‘남색질’로 철학을 하다

철학여행까페[87]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12.0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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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과 긍정의 철학자 질 들뢰즈(2)

들뢰즈의 철학은 대체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철학자에 대한 철학사적 연구의 시기이다. 둘째 시기는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를 냈던, 자신의 철학을 본격화한 시기이다. 셋째 시기는 가타리와 공동으로 철학의 영역을 넘어 작업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의 저작들은 철학사적 연구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플라톤과 헤겔처럼 철학사의 주류적 입장을 다루지 않는다. 그는 주류 철학사의 입장이 언제나 지배적이고 억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동희
앵그르 작 오이디프스.
오히려 그는 주류 철학사에 반기를 들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던 철학자들에 주목한다. 그가 주목한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흄, 베르그송, 스피노자, 니체 등과 같은 철학자들은 주류 철학사에 편입되지 않거나 편입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노선을 그린 철학자들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70년대 걸쳐 이들 철학자들에 대한 모노그라프 작업을 했다. 그는 이 작업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마치 남색질(enculage)을 하는 것과 같다.”

기존 철학의 변주 시도

민망스럽게도 ‘남색질’이라니? 도대체 들뢰즈는 ‘남색질’이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과거의 철학자들을 등 뒤에 덮쳐 어느 사이엔가 그들의 사생아를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해서 부모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괴물 같은’ 자식을 낳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철학사적 탐구를 통해 과거 철학자들의 아이디어를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다시 펼쳐 놓는다. 그는 흄, 베르그송, 스피노자에게 각기 다른 질문과 다른 주제 방식으로 접근해 ‘남색질’로 자식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 자식들은 ‘괴물’이기는 해도 헤겔주의와 변증법에 대한 철저한 거부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그렇게 낳은 자식들은 서로 공명하고 내통하며 들뢰즈 철학의 싹을 피운다.

들뢰즈의 이러한 ’남색질‘은 흄, 베르그송, 스피노자, 니체, 칸트 연구에서도 관통되며 변주된다. 특히 니체는 들뢰즈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신에 대한 니체의 영향을 들뢰즈는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니체 역시 등 뒤에서 덮쳐 사생아를 만들려고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니체가 내 등 뒤를덮치고 있더라.”

두 번째 시기에 쓰여 진 가장 중요한 저서는 무엇보다 <차이와 반복>이다. <차이와 반복>은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유명한 표현으로 요약된다. 플라톤주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주의는 수많은 개별자들의 원형인 이데아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 현실에 존재하는 의자는 하나도 똑같은 의자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똑같은 공장에서 나온 의자라고 할지라도 엄밀하게 말해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수많은 차이가 나는 의자를 ‘의자’라는 하나의 보편적 개념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모든 의자들에 공통적인 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주의에 따르면, 가장 원형적이고 모범적인 의자, 즉 이데아로서의 의자가 있으며 현실의 의자들은 그 이데아의 원형을 분유(分有)받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따르면, 우리는 손쉽게 우열을 가를 수 있다. 현실의 의자들 중 이데아의 성격을 더 많이 받은 것은 ‘보다 우월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보다 열등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렇게 이데아의 ‘원형’으로부터 우리는 모든 개별자들에게 수직적 위계질서를 부여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러한 수직적 위계질서와 우열 가리기를 문제 삼는다. 그는 모든 개별자들에게 수직적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이데아적 원형은 없으며 개별자들 사이엔 오직 수평적인 ‘차이’만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데아적 원형이 없으면 우열이나 수직적 위계질서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불완전한 것에서 원형에 가까운 완전한 것에로 이르는 ‘변증법적 발전’도 있을 수 있다. 그는 수평적 차이가 창출해낸 다양성들만이 계속 되풀이된다는 ‘반복’의 사상을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헤겔의 변증법을 제거한다.

세 번째 시기를 대표하는 글은 1972년에는 동료 F.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앙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일 것이다. 니체의 <안티-그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이 책 제목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니체적인 비판’을 시사한다.

반 오이디푸스적 전복

<앙티-오이디푸스>는 정신분석학의 중심 개념인 오이디푸스를 안티의 대상으로 설정해 전복을 꾀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긍정하며 옹호한다. 프로이드가 정의한 바와 같이 욕망의 오이디푸스화는 부정적이고 억압적이다.

그들은 ‘아빠-엄마-나’의 삼각형화를 통해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가족주의 틀에 가두어 버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비판한다. 그들은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역사적 혁명적 사유 안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앙티-오이디푸스>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인 것처럼 그들은 정신분석학비판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판을 시도한다. 우리는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본능적인 욕망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부성적 권위에 대한 복종과 죄의식을 통해 우리는 바람직한 사회적 가치로 자신의 삶을 예속한다.

오이디푸스적 욕망 길들이기는 욕망에 대한 각종 억압과 금지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도록 해 우리를 영원히 자본주의 아래에서 길들이고자 하는 것을 보여준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을 한다.

“이제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버지, 어머니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긍정하며, 반-오이디푸스적 욕망을 주장한다. 욕망은 문명화되기 위해,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체제 적응하기 위해 우리가 억압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욕망을 끝없이 분출하는 어떤 생명력의 일종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욕망과 생산은 동일한 힘이며, 그들은 그것을 ‘욕망하는 생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왜 이러한 욕망의 해방과 긍정이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적’인 것일까? 자본주의 체제가 오이디푸스적이라면, 본성상 비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의 긍정은 곧 바로 자본주의에 대해 혁명적이고 위협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앙티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긍정을 통해 ‘68년 혁명을 이론화하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1980년에 <천개의 고원>을 출간했다. 책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2’인 것을 보아 <앙티 오이디푸스>의 후속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전편인 <앙티 오이디푸스>만큼 두꺼우며, 난해해 읽기 어렵다.

<천개의 고원>의 핵심개념이자 서문을 장식하는 생경한 단어는 ‘리좀’이다. 그는 리좀을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긍정했던 욕망의 생산과 ‘무의식의 생산 그 자체’라고 한다.

리좀은 어떻게 그러한 무의식과 욕망을 생산하는가. 리좀은 일찍이 들뢰즈가 흄의 연구에서 발견했던 ‘접속사’를 매개로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음으로 생산한다.

그는 흄을 통해 ‘관계’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관계는 하나의 원리나 중심으로 통합되는 변증법적 통일이나 운동이 아니다. ‘관계’는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고 교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와’ 같은 ‘접속사’는 그러한 ‘관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접속사로 연결된 문장은 ‘A는 B다’라고 하는 동일률에 기초한 문장과 다르다.

‘A는 B다’라는 것은 동일성을 전제로 하거나 A의 B의 귀속을 나타낸다. 동일률은 타자를 일체화하거나 통합한다. 접속사로 이어지는 관계는 그러한 동일률에 기초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시켜 준다.

들뢰즈는 흄을 ‘접속사를 해방하고, 관계일반에 관해 고찰한“ 철학자로 이야기한다. 그는 흄에게서 이렇게 관계의 사상을 읽어낸다. 이 관계의 사상은 통합하는 원리와 중심을 갖지 않는, 따라서 전체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단편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 세계는 삐에로의 옷처럼 잡다한 색깔을 가진 여러 가지 천을 꿰매어 놓은 그런 세계 같은 것이다. 이 관계의 사상은 리좀의 중요한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e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원래 리좀은 식물학에서 뿌리를 한 곳에 깊이 박는 식물류가 아닌 담쟁이처럼 자신의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나가는 식물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리좀과 대비되는 것은 수목이다. 수목은 나무줄기로부터 가지, 가지로부터 다시 작은 가지로, 중심으로부터 거리에 의해서 정해지는 서열이 있다.

그러나 리좀은 전체를 통합하는 중심도 계층도 없다. 한없이 연결되고, 만나서 다시 새로운 생겨나게 하는 연쇄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서양의 학문에서 중심과 부분을 구분하고 질서를 나타낼 때 흔히 나무에 비유해 오곤 했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를 불어로 번역한 피코에게 편지를 쓸 때 학문의 체계를 나무로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온 철학은 하나의 나무와 같다 …그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그 줄기는 물리학이요, 또 그 줄기로부터 뻗어 있는 가지는 다른 여러 과학들이다.”

이동희
들뢰즈
68혁명의 사상적 토대

이 리좀이란 개념은 수목의 질서와 대비된다. 리좀은 철학적으로는 그동안 본질, 존재, 제일 원인, 목적론적 과정 등의 개념을 통해 모든 하위의 것들을 일사불란하게 질서 잡고자 했던 주류적 철학의 전통을 전복시키는 개념으로 생각된다.

리좀은 정치적으로는 단일한 자기 동일성의 확립을 통한 우열을 짓고, 타자를 복속시키는 체제와 질서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리좀은 비본질적이며 동일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리좀이 단순한 혼돈과 혼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은 이질적인 규칙과 배열과 운동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질서이다. 리좀의 개념을 사회에 적용해 볼 때, 리좀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들의 한없는 연결과 접속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1980년에 출간된 <천개의 고원>은 출간시 <앙티 오이디푸스>만큼 커다란 관심을 받지 못했다. 1993년 들뢰즈는 푸코의 자서전을 썼던 디디에 에리봉과의 회견 중 자신의 저서 <천개의 고원>을 언급했었다. 그는 이 책이 자신의 저서 중 가장 잘된 책인데,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책이 너무 두껍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그 책의 시대가 지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들뢰즈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 책의 시대가 지난 것이 아니라, 그 책의 시대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 했던 푸코의 말은 21세기에도 이어질 것 같다.

들뢰즈는 페암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그는 나중에 양 허파를 잃게 될 정도로 병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폐활량이 보통 사람의 1/8에 불과했지만, 그는 골초여서 강의시간에도 담배를 필 정도였다. 그리고 병든 몸이 못 견딜 때까지 알코올에 취해 살기도 했다. 손톱은 길게 길러 덩굴처럼 손가락 아래로 감겨 있기도 했다. 오랫동안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살던 들뢰즈는 1995년 11월 4일에 투신자살했다.

유이스망(D. Huisman)이 편찬한 <철학자 사전>을 보면, 들뢰즈를 괴상하고 별난(insolite) 철학자라 소개하고 있다. 소개대로 들뢰즈의 철학은 서술방식이나 표현 모두 별스러웠고, 항상 변화해 갔으며 기존의 다른 철학과 차이가 났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니체는 미완으로 남긴 <힘에의 의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가 ‘별짜’라는 것은 필연이고, 어쩌면 바람직한 것이다.”

<들뢰즈 편 끝>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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