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적이지만, 명민한 여학생-한나 아렌트[1]

철학여행까페[88]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12.0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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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1928.
15살 먹은 여학생과 무분별하기로 악명이 높은 젊은 교사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젊은 교사는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어 이 여학생을 화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이 꾹 참고 쉬쉬하는 것과 달리 이 소녀는 그 젊은 교사를 상대로수업거부를 주도했다. 이 소녀는 14살에 이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을 읽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동아리를 만들어 그리스 고전을 읽을 정도로 똑똑하고 조숙한 학생이었다.

사건이 벌어지자 학교에서는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불리한 조치를 취했다. 어린 여학생을 퇴학시키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녀의 양아버지가 교장을 상대로 항의를 해 보았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교장은 학생들을 주도해 수업 거부를 한 것을 학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다.

15세의 어린 이 여학생은 불의에 대한 불복종과 항의가 얼마나 힘든 결과를 낳는가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불의에 주눅 들지 않았다. 퇴학을 당한 후, 그녀는 가족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베를린으로 갔다.

그녀는 졸업도 하지 않은 채 베를린 대학에서 과르디니의 강의를 들었다. 그녀는 강의를 들으면서 신학과 키에르케코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다시 돌아 와 외부학생자격으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에 응시하겠다고 했다. 학교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1924년에 다른 학생들 보다 1년 먼저 졸업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이 고집 세고, 저항적이지만, 놀라울 정도의 지적인 여학생은 유대인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다. 그녀는 어머니 마르타 아렌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사회주의 계열의 그룹에 가입해 활동을 했고, 나중에 로자 룩셈부르크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룩셈부르크의 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이 일어나 총파업으로 일어났을 때, 그녀는 딸에게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사건은 짧은 순간에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15살에 수업거부 주도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자유단원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지만, 한나 아렌트는 처음부터 혁명가나 사회이론가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실존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가 사회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본격적으로 갖게 된 것은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깨달으면서부터이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 하노버 교외에 있는 린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바울 아렌트는 전기회사에서 일을 했다. 그녀의 나이가 3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질병으로 직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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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그녀의 가족은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이사를 갔다. 칸트의 고향으로 유명한 쾨니히스베르크는 십자군 원정 당시 독일기사단이 처음으로 건설한 도시이다. 칸트가 활동하던 18세기에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계 유대인들에게 계몽의 중심지였다.

한나 아렌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쾨니히스베르크의 집에서 ‘유대인’이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과 놀 때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유대인 문제를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반유대주의’라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7살이 되던 해 그녀는 부친과 조부를 동시에 잃었다. 어머니가 그녀를 홀로 양육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렌트의 어린 시절을 관찰하고 기록할 정도로 지적인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14살 때 마르틴 베어발트와 재혼했다.

마르틴 베어발트는 러시아 출신 금융업자의 아들로 꽤나 부유한 사업가였다. 그에게는 이미 아렌트 보다 나이가 많은 두 딸이 있었다. 이 두 딸은 모두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아렌트는 피아노를 배웠지만 음악적 재능이 모자랐다. 그리고 고집을 피워 바이올린도 배우러 다녔지만, 그녀의 재능은 다른 데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대학자격시험에 통과한 후, 철학과 신학 그리고 그리스어를 배우기 위해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갔다. 그녀가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간 것은 ‘가장 현대적이고 관심을 끌었던’ 후설의 현상학, 그리고 완벽한 스승이며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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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첫사랑, 철학 그리고 하이데거


아렌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과의 만남을 ‘첫 사랑’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철학이 그의 첫 사랑이었지만, 그것은 하이데거의 인격으로 현현된 철학이었다.

하이데거는 1922년에 정교수 대우를 받는 원외교수로서 마르크부르크 대학의 초빙을 받았다. 그는 당시에 하빌리타치온(교수자격 취득 논문)이외에 다른 글을 출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소문은 이미 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학생들은 하이데거를 ‘숨겨진 철학의 제왕’ 또는 ‘메스키르히에서 온 마법사’로 불렸다.

아렌트는 1924년에 마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 학생들은 그의 말투와 몸짓을 흉내 낼 정도였다. 이때 학생들 중에는 <생명의 원리>를 쓴 한스 요나스도 있었다. 아렌트는 4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다음 1969년 하이데거 탄생 80주년에서 이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회상했다.

“사람들은 사유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하이데거에 관한 소문을 따랐다.”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을 때는 18살의 어린 여학생이었다. 그때 하이데거는 두 아들을 가진 35살의 가장이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강의를 듣고, 그의 철학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하이데거에 대해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하이데거도 이 어리고도 총명한 여학생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편지와 시에서 자신의 헌신을 표현하였으며 그녀의 사랑이 꽃 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24년부터 1928년까지 4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기혼자인 하이데거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그때 아렌트가 쓴 무제라는 시를 보면 그러한 심적인 갈등을 엿볼 수 있다.

‘부끄럽게, 마치 비밀처럼/당신은 왜 나에게 손을 내미는지요?/당신은 우리의 포도주를 알지 못할 만큼/그렇게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인가요?’(192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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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야스퍼스
아렌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가서 후설과 함께 연구를 했다. 그녀는 하이데거와 떨어 져 있으면서 그와의 관계에 대해 반성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하이데거 밑에서 학위 논문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그녀를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칼 야스퍼스에게 소개했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와 의기투합하여 철학을 개혁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아렌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두 철학자에게 배우는 행운을 누린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때로는 함께 작업에 참여하면서.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만났을 때, 그는 <존재와 시간>을 쓰고 있었다, 아렌트가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왔을 때 칼 야스퍼스는 3부작으로 된 대작 <철학>을 쓰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어렸지만 아렌트는 이미 세계적 철학자들과 문제를 공유하고 지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세계적 철학자들과의 교류

하이데거는 아렌트와 만나던 시기인 1923년에서 1928년까지의 기간이 자신에게는 “가장 자극적이고 가장 침착하며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였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시기에 그는 <존재와 시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를 집필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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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와 어머니
아렌트는 야스퍼스에게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제목의 학위논문을 썼다. 학위 논문에서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을 야스퍼스의 철학 방법의 구조에 따라 사랑의 유형을 세계지향적인 사랑(appertitus), 그리고 초월적 사랑(창조주의 사랑caritas) 그리고 실존적 사랑(이웃사랑)으로 나누어 다룬다.

아렌트는 앞의 두 사랑이 지향하는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보고 있다. “너의 이웃을 너와 같이 사랑하라”는 이웃사랑은 변증법적 의미에서 앞의 두 사랑의 개념을 연결시키며 초월하고 있다. 이 학위논문에는 야스퍼스 이외에도 하이데거의 사유 방식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녀는 야스퍼스와는 스승으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철학적 토론자로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69년 야스퍼스가 사망하자 아렌트는 몇 개월 동안 검은 상복을 입고 다닐 정도로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1933년 하이데거가 나치당에 가입하자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해에 아렌트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협박을 받고 독일을 떠났다. 그녀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파리로 망명했다.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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