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평범하다

철학여행까페[90]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10.01.1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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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를 해부한 한나 아렌트[3]

아렌트 부부는 리스본을 거쳐 1941년 5월에 미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해 10월부터 뉴욕에서 발간되는 독일계 유대인 주간지 <건설>(Aufbau)에서 일했다. 유대사에 관한 글로 미국의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주로 시온주의자들과 함께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시온주의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정치 원리는 자유와 정의였다. 이 원리는 시온주의의 본질인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생각과 일치할 수 없었다.

이동희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미국, 새로운 시작


미국에서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1943년 유대인 학살 소식을 접한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유대인 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는 이 전대미문의 학살 사건을 추적한다. 그녀는 1945년부터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을 집필해 그 추적의 결과를 담는다. 이 작업 이외에도 그녀는 커다란 유대계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자리를 옮겨 카프카의 일기를 편찬하는 작업을 맡았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유대문화재건(Jewish Cultural Reconstruction, JCR)이라는 조직의 책임자로 일했다. 1949년에서 50년까지 그녀는 JCR의 위임을 받고 독일을 다시 방문했다. 그때 그녀는 1933년 이후 헤어진 칼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를 다시 만났다.

하이데거와의 만남은 괴롭고도 복잡했다. 하이데거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감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아렌트와 만나고 온 다음날 부인에게 그녀가 자기 삶의 열정이었고, 저서를 집필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미국으로 돌아 온 그녀는 1951년에 782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했다. 이 책은 영국에서는 <우리 시대의 짐>으로, 독일에서는 1955년에 <전체주의적 지배의 요소와 기원>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 제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는 전체주의는 인간성 또는 인간의 본질을 파괴하는 세력으로 ‘공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정부형태라고 말을 한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와 수용소 군도의 시각에서 전체주의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녀는 묻는다. 인간을 조직적으로 학살하고 유대인종을 말살하려는 전체주의 정권이 어떻게 현대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

인간성 말살의 지배

그녀는 이러한 물음을 파헤치기 위해 대부분 역사학자들이 쓰는 순수한 인과적 서술 방식을 쓰지 않았다. 전체주의는 단순한 역사 문제가 아니라 현실 정치의 문제였다. 그녀는 전체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역사적 설명뿐만 아니라 전체주의 운동 및 지배의 본질적 구조를 밝혀내야 했다.

그녀는 반유대주의, 제국주의를 전체주의 운동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억압으로 파악했다. 그녀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유럽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그 원인에 대해 분석한다. 유대인들은 유럽의 민족국가 형성과정에서 막대한 자본과 신용으로 국가의 중요한 재정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일종의 정치적 특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세기말 제국주의가 도래한 후 민족국가는 쇠퇴해 갔고, 유대인과 국가 간의 그러한 밀착관계는 끝이 난다. 제국주의 시대는 전통적 계급체제가 붕괴되고, 정치권력이 대중으로 이행한 시기이다.

정치적 특권을 잃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부가 바로 대중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에 반유대주의가 형성되었지만 아직 그것은 유대인들을 말살하는 폭압적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녀가 볼 때, 제국주의는 전체주의가 정치세력화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국주의의 팽창은 유럽 대중에게 식민지 인종에 대한 지배 의식과 식민지 인종주의적 편견을 전파했다. 전체주의는 이러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통해 새로운 정치권력으로 등장한 대중들을 규합했다.

다른 한편으로 제국주의 시대에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개인적 이익에만 관심을 갔던 부르주아지에 의한 정치 개입이 시작된 시기이었다. 부와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지는 온갖 부조리와 부패를 야기했다.

대중은 불만에 가득 차 있지만 고립되어 있으며 사회에서 주변부를 차지했다. 전체주의는 부르주아지의 탐욕과 자만에 찬 지배에 대해 이런 대중들을 규합해 그들의 세력을 얻어 나갔다.

전체주의는 이들을 교묘하게 정치 조직화하고, 거기에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까지 동원해 자신의 체제를 구축했다. 실제로 히틀러와 스탈린은 대중의 인기를 얻고 권력을 장악했다. 대중들의 간절한 열망에 대한 응답이었다.

전체주의의 지도자들은 이들 대중에게 개인적 정체성과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 주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기반해 전체주의 하에서 대중은 거대한 폭력적 군중으로 변하게 된다. 아렌트는 이러한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폭력적 대중(mob)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전체주의는 독재체제와도 다르다. 독재자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이나 권력을 위해 시민의 이익을 배반하고 억압한다. 그리고 거창한 목적을 내세운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인간에 대한 전체적 지배를 목적으로 한다. 전체주의는 지배수단으로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사용한다. 이데올로기는 역사와 미래 그리고 세계를 설명하는 논리적 신념체계로서 전체주의 운동의 논리성을 제공한다.

독재정권이 무력을 사용하여 대중들을 지배하는 것과 달리 전체주의 체제의 지배자와 대중은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논리성에 스스로 굴복하고 그것을 위해 일한다.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지배자는 이데올로기적 논리성에 스스로 신념화된 지배자이다.

그들은 그들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가공할 폭력인 ‘테러’를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테러는 그들의 신념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정당화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테러’를 통해 그들의 신념에 위배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나간다.

그들은 ‘전체의 신념’을 위해 인간들의 자유와 다양성 등을 제거하고, 전체의 목적을 위한 거대한 규모의 단일한 인간을 만들어 낸다.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테러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러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러 사람들의 복지나 한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개조로서, 종(種)을 위해 개인들을 제거하는 것이며 전체를 위해 ‘부분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테러의 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바로 강제수용소이다. 강제수용소는 전체주의의 근본신념이 실험되고 검증되는 실험실로서 모든 인간의 개별성과 자발성을 말살해 버리는 곳이다.

이 강제수용소를 통해 드러난 전체주의라는 정부형태가 목적한 바는 바로 인간성의 완전한 파괴와 말살이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한마디로 말해 전체주의는 인간성 또는 인간의 본질을 파괴하는 세력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유일한 정부형태라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의 결론에서 그녀는 인간의 모든 공동생활을 파괴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해 정치적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인간의 자유를 옹호한다.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하다.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새로운 탄생이 이 시작을 보장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이동희
아이히만
인간 조건 ‘비타 악티바’


<전체주의의 기원>이 출판되자마자 아렌트는 곧바로 유명세를 탔다. 아렌트는 그 영향으로 1951년에 미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미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그녀는 파리에서부터 12년간 무국적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무국적자의 삶을 통해 처절하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국적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에 해당하는 인간의 기본 권리였다는 것이었다. 이와 연관해 그녀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자 조건으로서 인간의 정치적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녀는 1958년에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녀는 기존의 정치이론들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그녀는 탄생, 죽음, 삶, 다양성, 세계 등 인간 실존의 조건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활동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조건들에 대해 탐구한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 문화로 거슬러 올라가서 세 가지 근본적인 인간 활동을 구분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 작업 그리고 행위를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육체적 활동이며 작업은 수공업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뭔가 만들어내는 활동이다. 그리스인들은 빵을 굽거나 아이를 낳거나 생존에 필수적인 노동은 노예, 외국인 그리고 여성의 소관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공공 생활의 영역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작업도 육체적 활동과 연관이 있으며 이것도 자유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은 자유인이 해야 할 활동이란 폴리스의 공공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위다.

공공 영역인 정치적 영역에서의 말과 행위는 인간이 자기만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이것이 인간을 형성하는 본질이다. 만약 이러한 말과 행위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숨을 쉬며 죽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고유함을 드러내고 또한 서로를 이해한다. 이러한 것이 인간의 다양성을 형성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으로 정치 공동체와 공적 문제에 대한 절대적인 참여를 주장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이후에도 여러 가지 책들을 계속해서 펴냈다. <과거와 미래사이>(1961), <혁명론>(196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정신의 삶>(1978)을 썼다. 특히 예루살렘에 있었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담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유대인 학살자, 악의 평범성

1960년 5월 24일 이스라엘 비밀요원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해 이스라엘로 송환하였다. 송환과정을 두고 국제적 논란이 벌어졌지만,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예루살렘에서 재판하고자 했다.

아이히만은 누구인가? 아이히만은 1906년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 비밀 나치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하인리히 히믈러가 조직한 나치 친위대(SS) 정예부대에 들어갔다. 히믈러가 국가안전국 (RSHA)을 창설했을 때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담당부서에서 일했다.

1942년 1월 베를린 근교에서 나치 고위관리들이 모여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유대인의 대량학살이었다. 아이히만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유대인을 선별하고 집결시킨 다음 집단수용소로 보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 그를 추적하던 이스라엘 비밀요원은 1960년 5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그를 체포했다. 1961년 4월 11일부터 시작된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아이히만의 재판 소식을 들은 아렌트는 <뉴요커> 편집장에게 리포터를 자청해 재판을 직접 참관하겠다고 제안했다. 아렌트는예정되었던 대학의 강의도 취소하고 재판을 참관하였다. 그리고 5번에 걸쳐 재판 참관 기사를 <뉴요커>에 썼다.

아렌트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성격 파탄자이거나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멀쩡하고 평범한 사람임에 놀랐다. 아이히만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칸트를 들먹이며 자기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검찰 심문에서 자신은 이상주의자이며 자신의 이상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아렌트는 이런 경찰심문과 재판과정에서 보인 아이히만의 행동을 허풍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과거까지 면밀하게 탐지해 그가 스스럼없이 자행한 악행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악행의 원인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사유할 능력이 없는 데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복종’과 칸트의 ‘의무’를 구별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상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능력이 없는 그는 자신의 이상에만 충실해 그것이 타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히만은 타인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능력도 부재했다.

그가 쓰는 말들은 나치가 만들어 낸 상투어였다. 그러한 언어는 현실을 호도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현실에 대해 눈감게 해준다. 예를 들어 학살이라는 말 대신에 최종해결책, 유대인 이송작업은 재정착과 같은 말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는 스스로를 기만하고,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뭉쳐진 스스로 사유할 능력이 없는 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자 한 정상적인 한 관료이자 책상 앞의 살인자였다.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이런 기사는 많은 반대와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1963년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녀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나왔을 때 그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유대인들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으며 유대인 수백만명을 학살한 악을 사소하고 평범한 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저명한 시온주의 학자 숄렘도 그녀에게 유대인의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실 그녀가 ‘악의 평범성’이란 이 말을쓴 것은 본문 말미에 단 한 번나왔을 뿐이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아이히만)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악의 평범성에 대한 그녀의 주장은 그녀의 사후에도 많은 반대를 낳았다. 철학자 칼 포퍼는 1982년에 <Times Literary Supplement>에 쓴 글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아렌트의 개념은 무의식적으로 하이데거와 낭만주의를 옹호하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악행이 얼마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주항쟁에서 명령을 이행하는 군인들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했겠지만 그것은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는 악행이었다. 악은 평범하지만 우리가 옳고 그름에 대해 사유하기를 멈추었을 때, 그것은 전 세계에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항상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아렌트는 1953년부터 프린스턴, 하버드, 버클리 등과 같은 미국 주요대학들의 초빙을 받아 강의와 강연을 했다. 그녀는 1959년에 프린스턴 대학 최초의 여교수가 되었다. 1963년부터 그녀는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 1967년까지 일을 했다. 또 1967년부터 1975년에 사망할 때까지 뉴욕의 사회조사대학원의 정치철학 교수로 일했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외에도 <혁명론>(On Revolution, 1963),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 1968),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 Lying in Politics, 1969), <시민적 불복종>(Civil Disobedience, 1969), <폭력의 세기>(On Violence, 1969) 등 중요 저작들을 연이어 출간했다. 그녀가 보여 준이론적 정치적 활동은 그녀 생전에 이미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녀는 1959년에 함부르크 시가 수여한 레싱 상을, 1967년에 독일언어예술학술원에서 준 지그문트 프로이트상을, 1975년에는 유럽문화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코펜하겐 대학의 존닝 상을 받았다.

이동희
아렌트의 무덤
“아모르 문디”


1973년과 1974년에 행한 에버든 대학의 기퍼드 강의들에 기초해서 그녀는 나중에 유고작이 될 <정신의 삶>을 집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기하였던 물음인 인간의 사유력과 정치적 행위의 연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정신의 삶>은 사유, 의지 그리고 판단의 3부작으로 집필될 예정이었다.

그녀는 1부와 2부는 완성했지만, 3부 ‘판단’은 완성하지 못했다. 1975년 3부 판단의 집필을 막 시작할 무렵 그녀는 두 번째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1부와 2부는 <정신의 삶―사유>와 <정신의 삶―의지>로 1978년 출간되었으며 완성되지 않은 3부에 해당하는 ‘판단’ 부분은 유고집으로 1982년에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아렌트의 장례식은 1975년 12월 8일 리버사이드 기념 예배당에 거행되었다.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마르부르크 대학 동기인 한스 요나스는 아렌트에 대해 이렇게 조사를 하였다.

“제가 이 남다른 신입생을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며,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와 고독한 눈매를 지닌 아렌트는 금방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예외적이며, 남다르게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철학의 깊은 심연으로 빠져 들어 가지 않고, 일생 동안 유대인 문제와 현실 정치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그녀는 인간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평생 열정을 바쳐 연구했다. 그녀가 그렇게 열정을 바친 까닭은 단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아모르 문디(세계사랑)!”

(연재 끝)

<그동안 철학여행카페를 사랑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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