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결혼, 역사의 반복

[색깔있는 역사스케치] 정창수l승인2010.01.1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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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이 있던 1910년 11월 28일, 한무리의 조선여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선착장에는 태극기를 든 조선남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내리는 여인들은 새신부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사탕수수농장에 노동이민을 온 조선 사람들과 ‘사진결혼’을 한 상태였다.

하와이에 온 노동이민자들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오래도록 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돈만 벌면 곧장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때문에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여자는 1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체류는 길어졌고, 결혼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소개료와 신부 가족에 보상하는 돈을 주고 사진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여인들은 비록 돈 때문에 결혼하지만, 대부분의 결혼이 그렇듯이 부유한 미국에서 행복한 미래에 대한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에 부풀어 있던 여인들의 꿈은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되어버렸다. 신부들보다 평균 열다섯 살이 많은 신랑들은 고된 노동 때문에 원래의 나이보다도 더 늙어 보였다. 더구나 이국 생활의 어려움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 같은 남편과 낯선 이국땅에서 산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1천여 쌍의 사진결혼이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6천명에 달하던 남자 독신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한인사회의 안정에는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 농장주들의 세심한 배려(?)때문이었다. 하루 10시간 이상 사탕수수밭에서 중노동을 하던 한국인들의 노동의욕 감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음주나 도박 심지어 마약까지 손을 대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나 흑인노예가 사라졌다. 그래서 보다 적은 비용으로 부릴 수 있는 대상으로 아시아인들을 찾았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철도나 금광지대에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 등 수만명이 노동자로 유입됐다.

당시 미국인들은 다른 아시아 인종에 비해 한인들은 유순하다는 점에서 중국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종황제를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해 이민사업을 추진했다. 그래서 일본이 이민을 금지한 1905년까지 이민을 떠났다.

초기 이민자인 이홍기 옹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이 얼마나 혹독한 조건에 있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해야 했다. 감독들은 우리를 소나 말처럼 다루었다. 누군가 감독의 말을 어기면 뺨을 때리거나 가혹하게 채찍질을 했다. 우리는 결코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않았고 대신 번호를 부여받았다.”

더구나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인종배제법에 따라 한인과 백인과의 결혼, 토지소유, 직업금지 등을 규정했다. 따라서 돈을 모아도 농장을 임대할 수 없었고, 음식점이나 호텔, 이발소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상황은 민권운동의 절정기였던 1965년에야 끝났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주도한 흑인민권운동의 결과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흑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물론 일부 소수유력 한인들의 경우는 달랐다. 1890년에 서재필은 5년 만에 시민권을 받았다. 1945년경까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은 약 1만명 정도였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만여명의 재미한인들은 일제시대 전까지는 고국에 인두세를 냈고,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자금 300만 달러를 모아서 전달했다. 당시 미국 4인 가족 최저생계비가 30달러 정도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수억 달러에 이르는 큰 돈이다. 이것만 보아도 재미한인들이 가슴 절절히 독립을 갈망한 것을 알 수 있다. 조국은 그들에게 관심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상당수의 돈이 이승만의 개인사교를 위한 ‘파티 독립운동’의 화려한 술잔 사이로 사라졌다.

그래도 미국이민자들은 그나마 나은 축에 든다. 멕시코로 떠난 1천여명의 조선 사람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영화 <애니깽>에 묘사되어 있다. 이들 중 일부가 쿠바까지 진출, 몇몇은 쿠바혁명에도 참여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미국 이민사회에서 딸 가진 집안이 대부분 부유했다는 것이다. 한인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아주 좋은 조건을 골라 부유한 한인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이 힘들었던 것은 백인과의 결혼이 금지되었고 타민족과의 결혼을 아예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인과의 결혼을 저주했가. 당시 하와이에서 일본인은 인구의 반을 넘는 7만 명이었다. 일본인에 대한 한인의 적대감은 조국이 식민지가 된 이후 더 고조되었다.

지금 국내에는 수십만 명의 외국인노동자들과 국제결혼을 통한 여성들이 들어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이방인으로 차별받고 있다. 100년 전 사탕수수노동자들에 대한 대접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 장시간 저임금에 시민권은 고사하고 결혼에서도 불행한 상황에 놓여있다. 겪어본 사람들이 더한 것인가 아니면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한심한 민족일 뿐인가. 사진결혼 정도의 세심한(?) 배려도 꿈도 꿀 수 없지 않은가.


정창수 편집위원

정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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