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사회의 메아리

강상헌의 한자이야기[16]-아이 밸 잉(孕) 강상헌l승인2010.01.1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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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본디’가 새겨진 생명(生命)을 내 몸 속에 품고 자라도록 하여 누리에 내보내는 것, 아이 밸 잉(孕)자가 보듬은 뜻이다. 모양으로 보면 ‘이에’ ‘곧’ 따위의 뜻을 가진 어조사 내(乃)와 아들(자식) 자(子)의 결합(結合)이다. 고문자 특히 소전(小篆)의 모양(그림 아래)은 생명의 비롯함이 옛 사람들에게 주었을 큰 기쁨을 그리고 있는 듯해 눈길을 오래 잡는다.

문자의 원래 형태와 의미를 이르는 자원학(字源學)에서는 갑골문에 나타난 ‘아이 밴 모습’(그림 위)이 나중에 모양이 변해 원래와 닮지 않게 되었다고 푼다. 다른 학설(學說)이 없는 것은 아니나, 금문(金文) 이후 지금의 모양인 해서(楷書)에 가깝게 변했다는 것이다.

종족 번식의 의욕은 무릇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본능(本能)이며, 세상을 영속(永續)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떤 대가(代價)를 치르고라도 이뤄야 하는 섭리(攝理)의 의무이자 권리다. 위험과 노력, 기쁨과 아픔이 교차(交叉)하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절차다. ‘생명’의 가장 큰 뜻은 아이를 배고 낳아 기르는 이 절차가 끊이지 않게, 또 더 번성(繁盛)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文明)이라는 ‘허울’이 본디를 가려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뜻, 섭리를 잃고 허영(虛榮) 속을 헤매게 한다. 이 본디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인간 아닌 다른 생명을 학살(虐殺)하고, 그 터전을 파괴한다. 어리석게도 끝내 자신의 움집마저도 깨뜨린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는 점을 떠올린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성숙(成熟)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주제다.

두 사람이 가정(家庭)을 꾸려 기껏 한 사람의 자녀만을 둔다면, 좀 심하게 말해 점진적(漸進的)으로 자멸(自滅)을 향해 가는 사회의 모습이다. 주위를 보면 아예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고는 싶은데 낳을 수가 없다고 선언(宣言)하다시피 하는 젊은 부부들도 적지 않다. 배운 사람일수록, 잘 사는 동네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2008년의 국내 합계출산율은 세계최저수준인 1.19명으로 이런 현상을 실증적(實證的)으로 보여준다. 이는 일본(1.37명)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73명)에도 한참 못 미친다. 2009년 출산율은 더 낮은 1.12명으로 집계될 전망이다. 생명의 본디를 철저히 외면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불임(不姙)사회인가.

이제 아이를 낳으라고 성화다. 낳으면 (정부가) 키워 주겠다는 ‘약속’까지 나온다. 그러나 누가 이를 믿을 수 있을까?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 아들딸의 문제라면 어떤 패를 쥘 것인가. 대한민국은 길을 잃었는가.

아이 밸 잉(孕)의 뜻이 퇴색(退色)한 것이다. 또 이 ‘본디’가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지를 망각하는 집단적 치매(癡呆)상황에 빠진 것이다. 현상의 뿌리는 가늠도 못하면서 ‘면피용’ 또는 생색내기 정책만 펼친다. 그러나 정부의 정직성과 능력에 대한 국민의 회의(懷疑)는 이런 노력의 결과를 이미 예측하게 한다.

아이를 배고 낳는 일의 중요성은 예로부터 이 절차를 가리키는 말이 매우 다양했다는 점으로도 입증된다. 孢(포) 肧(배) 胚(배) 腜(매) 孡(태) 胎(태) 囼(태) 娠(신) 姙(임) 妊(임)자 등이 모두 ‘아이 배다’는 훈(訓)을 가지며 ‘품는다’는 懷(회)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임신(姙娠) 잉태(孕胎) 배태(胚胎) 회임(懷妊) 등의 낱말도 마찬가지다. 또 㞌자는 잉(孕)자와 뜻도 소리도 같다. 잉(㚺)자도 같은 글자다.

에워싼 울타리(囗 에워쌀 위 또는 나라 국) 안에 별(台 별 태)이 깃들인다는 발상(發想)이나, 주검 즉 죽은 사람의 몸을 이르는 尸(주검 시) 안에 子(아들 자 또는 자식 자)를 놓은 옛사람들의 생명의 탄생에 관한 생각이 놀랍다. 죽음과 탄생을 동전의 앞뒤와 같은 생명의 다른 모습으로 보았던가.

품다, 품어 가지다, 분만(分娩)하다, 부화(孵化)하다, 기르다, 머금다 등의 뜻을 가진다. 아이를 밴 것 뿐 아니라 낳는 것 까지도 포괄하는 단어인 셈이다. 바야흐로 잉(孕)의 뜻을 회복해야 할 때다. 옛사람들이 품었을 그 기쁨도 함께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사회신문 한자교육원 예지서원 www.yejiseowon.com

토막해설-아이 밸 잉(孕)

뜻을 나타내는 형부(形符) 자(子)와 음(音)을 나타내는 성부(聲符) 내(乃)가 이룬 형성자인데, 내(乃)자에 ‘애’로 발음되는 ‘노 젓는 소리’라는 뜻이 있어 ‘잉’이라는 음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내(乃)자가 태아(胎兒)를 그린 것으로 잉(孕)자의 원자이며, 후일 내(乃)가 ‘곧’ 등의 조자(助字)로 쓰이게 되자 구별하기 위해서 자(子)를 덧붙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설문해자’는 내(乃)자를 단지 ‘말이 술술 나오지 않고 막히는 상태(狀態)를 나타내는 것’으로 풀었다. 그래서 위의 글을 받아 아래의 글을 잇는 조사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상헌 논설주간/한자교육원 예지서원 원장

강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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