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성인가 철학빈곤인가

정부의 하반기 슬로건은 “공정한 사회” 인 것 같다. 그동안의 몇 차례 시행착오 뒤에 나온 정책방향인 듯 하다. 공정한 사회가 무엇인지 매우 애매하지만 제대로 정의하고 적극적으로 정책을 개발해 추진하면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정의하지 않고 구호에만 그치면 혼란과 분란을 일으키는 또 한 번의 정책실패가 될 수도 있다.

7%공약은 어디로 갔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당시에는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747공약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 경실련 대표 취임식(2008.2)에서 그것이 허황된 공약이고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성장단계의 잠재성장률로 보아 연평균 7% 성장을 지속하는 것이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2007년부터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였다. 우리경제에 하자가 있어서 위기를 맞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 등 선진국과 중국과 개도국을 막론하고 세계경제에 깊게 개방되어 있는 우리경제로서는 개방정도만큼 타격을 받게 되어 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경제의 평균성장률은 1.2%에 불과하다. 지난해만 보면 0.2% 성장에 그쳤다. 7% 성장은 가당치도 않는 목표였다.

그러자 슬그머니 세계에서 가장 빠른 회복국가로 목표를 바꾸었다. 올해 성장률 예측이 6% 내외가 될 것으로 보아 아마도 OECD 국가들 중에 빠른 회복세를 보이는 나라가 될 것이다. 6% 성장률이라는 것은 지난해 거의 0%를 기준에서 본 것을 감안하면 그다지 높은 것이 아니다. 이나마도 잘 방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허황한 747공약에는 미치지 못한다. 7% 공약을 언제부터 왜 버렸는지 충분한 설명도 없다. 정책의 유연성인가 아니면 국민에 대한 약속위반인가 혹은 철학의 빈곤인가?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내세웠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부자감세,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기업인 사면 등 재벌과 부자를 위해 많은 규제완화와 사면정책을 고수해왔다.

최저층 도움되는게 ‘공정’

그 결과 국민들 간에는 빈부,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 간의 양극화가 더욱 깊어진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지난 6.2 지자체선거에서 여당의 참패로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정부는 지난해부터 친서민 정책을 내세웠다.

미소금융, 햇살론 등 서민을 달래는 정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주로 선거전에 친서민을 내세웠다. 이유야 어떻든지 친서민으로 정책을 선회한 것은 잘 한일이다. 그정책이 얼마나 실효있는 정책대안들을 동원하여 성과를 거둘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특히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는 구조적 모순들을 해결하지 않고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이 있는지 궁금하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확실한 정책들로 이미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친서민 정책은 눈에띠는 굵직한 대책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친서민의 핵심은 청년들과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과 사회 최빈층에 대한 지원과 희망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실효성있는 대책들로 국민의 지지를 받을 것인지 실효성 없는 구호로만 그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만약 후자로 간다면 이 또한 747처럼 국민을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다.

올해 8.15 경축사에서는 공정한 사회를 내세웠다. 아주 그럴듯한 정부 후반기 정책목표이다. 그런데 공정한 사회가 무엇인지 일치된 견해가 없다.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벤덤의 공리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의 최대 다수가 행복해질 수 있는 행복극대화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다수를 위해 소수의 자유와 인권이 짓밟혀도 된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 맡기면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시장이 해결해 주므로 시장의 자유경쟁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시장중심주의 사고도 있다. 시장의 자유경쟁이 공평한 분배를 이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공정으로서 자유’의 저자인 롤스는 사회의 최저층에 도움이 되는 한 차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차등의 원칙을 주장한다. 이를테면 의사에게 버스기사보다 더 높은 보수를 주는 식으로 약간의 불평등을 인정한다면, 빈곤층의 의료 혜택을 늘릴 수 있다는 등 사회에서 가장 약자에 속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원칙이다.(샌덜, 정의란 무엇인가)

불공정을 바라보는 시선

이같이 공정한 사회가 무엇인지는 합의를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결과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공정한 것인지 결과에 차등이 있더라도 기회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어떠한 규칙을 정해놓고 규칙에 의한 경기결과 자기 몫을 정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분배받고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든가 아니면 일한 만큼 대접받아야 한다, 또는 필요에 따라 분배받아야 한다는 등 공정에는 여러 가지 원칙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정부가 공정한 사회를 말할 때 이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여야 한다.

이런 설명 없이 구호로만 공정한 사회를 외치게 되면 혼란이 올 수 밖에 없다. 유명환 전장관의 여식을 해당부서의 5급 공무원으로 특채한 것은 공정한 것인가. 물론 불공정이지만 실은 그 이전에 법을 어긴 탈법행위이다. 따라서 처벌이 필요한 사안이다. 공정한 사회란 법질서를 바로 잡는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합법적이라해도 양극화처럼 혹은 구조적 초기조건의 차이로 불공정이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불공정을 어떻게 시정하는가가 중요한 해결과제가 되어야 한다.

가령 공정한 사회는 타고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도 많이 달라질 수 있다. 부자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과 빈자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출발부터 공정한 경기를 할 수가 없다. 이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공정한 사회인가. 과거 불공정으로 차등이 생긴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면 과거에 정부의 지원과 혜택으로, 이는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부를 축적하게 된 부유한 기업들과 그러한 혜택이나 지원이 전혀 없는 오늘날 새로 출발하려는 창업 기업이나 중소기업들과의 공정한 경쟁은 무엇인가. 과거를 무시하고 현재 있는대로 자유경쟁하면 되는 것인가.

공허한 정책목표 보는 듯

더구나 기존 부유한 대기업이 반칙을 일삼으며 부를 유지 증대시키고 있는 것을 사면해주는 것이 공정한 것인가.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이 없거나 잃은 자에게 다른 잣대를 가지고 조사하고 기소하고 판결을 하는 것은 또 공정한 것인가.

이외에도 공정성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을 그대로 놓아둔 채 공정한 사회를 외쳐봤자 또 한 번의 공허한 정책목표가 될 수 있다. 이미 정부가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공정성을 더욱 후퇴시켜놓고 공정한 사회를 내세우는 것은 유연성인가 혹은 철학의 빈곤인가도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