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회 부모정치’

1976년 중국 당산에서는 27만 명이 대지진의 희생자가 된다. 그 무서운 충격을 이겨내고 당산은 폐허 위에 다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나간다. 아니 새로운 의지를 가진 인간형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21세기 중국은 이런 당산의 비극을 딛고 일어선 자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국제부산영화제에서 본 펑샤오캉 감독의 영화 <대지진(Aftershock)>는 그런 중국의 지난 비극과 현재의 자존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이 영화의 밑바닥에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재앙의 고통을 이겨낸 중국의 지금도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지진이 일어난 뒤

칠레에서 서른 세 명의 광부들이 70일 가까이 땅 속에 갇혀 있다가 전원 구조되었다. 이제 그 구조과정과 생존담이 점차 알려지겠지만 경이로운 일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달성한 생명의 승리라는 점에서도 더욱 칠레의 기쁨은 클 것이다. 굉도가 무너지고 두 달 넘는 시간 동안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었을 그 나날들을 이들이 이겨내고 살아난 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칠레 전체가 나누게 될 희망의 스토리가 되어갈 것이다. 오래 전 군사독재의 공포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면모를 가꾸어나가고 있는 칠레는 이 사건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읽어내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명박 정권은 G20을 내세워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을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G20은 열리는 곳마다 반G20시위와 함께 인류의 다른 선택에 대한 논란이 펼쳐진다. 이명박 정권은 이런 모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경찰력 강화로 G20의 일방적인 홍보에만 진력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G20에 대한 반쪽 진실을 가리는 것일 뿐이다. 지진의 충격 속에서 땅 속에 묻혀 살아날 기력조차 사라져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이명박 정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눈물과 그들의 하소연에는 귀를 막고 있다. 그래서 G20회의가 열리는 곳에서 노점상들은 쫓겨난다.

자식을 버리는 정부가 있다면

가난한 자들을 버리는 정부는 이미 정부가 아니다. 오랜 유교의 가르침이 사라지지 않은 동아시아의 세계에서 정부는 부모다. 서구 정치철학에서 가르치는 비정하고 메마른 계약관계의 산물이 아니다. 계약관계로 만들어진 정부는 유한책임을 지면 되지만, 부모는 무한책임이다. 백성을 보살피지 못하는 군주는 하늘의 벌을 받아 갈린다. 역성혁명은 그런 논리와 철학에 바탕을 둔다.

서구 정치의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이러한 논리와 철학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서구 정치에서 논하는 복지는 이미 동아시아의 정치철학에서 부모가 되어야 할 정부의 당연한 책임이다. 백성을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피고 그 고통을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정부는 부모 된 도리를 버린 자의 몰골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렇게 정부를 부모처럼 여긴다고 해서 그것이 정부의 전근대적 권위주의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자신을 희생하고 던지더라도 자식 된 국민들의 삶을 무한히 책임지려 하는 윤리의식이 요구된다. 호 아저씨로 불린 호치민(호지명)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받았던 존경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베트남 국민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으며 호의호식하려는 일체의 마음이 없는 채로 희생적으로 국민들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그건 자기희생적인 부모의 모습이다.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정부가 뭣이 문제인가?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케이블카 없는 설악산을 꿈꾸며” 설악산 이곳저곳에 말뚝을 박고, 온몸이 때려 맞은것처럼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몸살을 앓을것이 분명하다. 설악산을 그냥 걸어보자고, 자연을 그대로 느껴보자고, 설악산을 지키는 박그림 설악녹색연합 대표는 케이블카를 반대하며 자벌레처럼 설악산 오체투지를 시작했다. 녹색연합

공동체 운명 온몸으로 껴안아야

선거를 통해 뽑히는 정치지도자가 이런 부모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될까? 자기 먹을 것만 챙기고 호의호식할 궁리에 빠질까?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있을까? 못난 자식은 버리고 잘난 자식만 챙기려 들까? 유산도 그렇게 남겨주게 될까? 유교의 정치철학이 가지는 모순과 문제도 있지만 한 공동체의 운명을 온몸으로 껴안고 나가려는 의지와 생각이 가득 찬 인재나 인물이 그 국가의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진리다. 그 요구에 맞는 인물을 골라 책임을 맡기는 것이 정치라면 그런 정치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부모같은 정치를 만나야 국민들이 편하게 살 수 있다. 자식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그걸 어떻게든 뜯어말리고 우애 좋게 지내도록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 사회가 마치 한 가족처럼 사이좋게 지내면서 누구 하나 기울게 사는 일 없도록 해주게 되지 않을까?

부모 속을 모른다고 이런 투정 저런 비난해도 웃는 낯으로 다독이면서 인자하게 받아들이고, 또 자식이 부모 위해 하는 말이라면 화내지 않고 차분히 듣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런 덕스러움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게 되진 않을까? 외부의 공격이라도 있게 되면 목숨 걸고 자식들의 생명을 지켜내고, 어느 하나 털끝도 다치지 않게 하려 들지는 않을까? 어떤 부모가 제 살겠다고 자식을 대신 죽음의 자리로 몰아내겠는가?

부모같은 정치를 만나는 기쁨

물론 이런 이야기는 모두 좋은 부모를 전제로 했을 때만 성립하는 논리일 것이다. 밤낮 술이나 퍼마시고 이상한 짓이나 하면서 돌아다니고 자식들 돌보지는 않고 사치로 몸을 휘감고 사는 부모라면 그 부모는 이미 부모가 아니다. 세상에는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모와 부모가 아닌 자들이 있을 뿐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국민들을 품고 밤낮으로 자식 위해 애타는 심정으로 동분서주하는 정치가 있다면 그건 유교인가, 전근대인가, 서구철학의 소산인가 하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정치다.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 운명이 펴지듯이 국민들은 부모같은 정치를 만나야 기를 펴고 산다. 그런데 오늘날 이 나라 정치는 부모 없는 자식들처럼 국민의 삶을 만들어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정치란 무릇 책임이 맡겨진 시간 동안 혼신을 다해 백성들의 앞날에 희망을 주고 어둡던 운명에 등불을 비쳐주는 일이다. 어쩌면 훌륭한 군주 하나 있는 것이 이기적이고 졸렬한 지도자들 여럿이 민주주의의 옷을 걸치고 행세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군주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정치체제가 달라졌다고 해도 정치에 기대하는 내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싸우지 않아도 될 일에 싸우면 말리고 불공정한 일에는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가난한 이를 일으켜 세우며 누군가 혼자 너무 부를 쥐지 않도록 하는 것은 고금의 진실이다. 백성들의 아우성이 들리면 귀를 기울이고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상소가 잇달아 올라오면 겸손하게 생각을 고쳐먹을 일이다.

가장 선진적인 정치란?

술수를 앞세우고 욕심을 은폐하고 자기 명성에 취하는 정치는 국민들의 미래를 망칠 뿐이다. 격과 덕이 없는 정치는 정치를 자신을 위한 도구로 활용할 뿐이다. 그건 모두를 위한 집에서 모두를 쫓아내고 자기 혼자 턱 하니 온통 차지하고 사는 욕심꾸러기와 다를 바가 없다. 국민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노고라도 아끼지 않고, 허튼말을 하지 않으며 겸손하고 인자한 자세로 백성을 떠받들면 자연 그런 정치에서 선한 것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정치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기 쉬우며 그런 정치에 대해 뜻을 가진 이라면 누구든 택할 수 있는 길이다. 우애 좋은 가족같은 사회를 만들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부모 같은 정치를 펼치는 미래를 꿈꾸어 본다. 난데없는 유교철학 타령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가족을 버리지 않는 정치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운 때 인자한 아버지처럼 기대고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정치야말로 가장 선진적인 정치다. 빈부격차로 고통 받고, 사회적 진출에서 차별을 받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진력을 다하는 그런 국가와 정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까닭에 무엇보다도 권력의지를 넘어서는 투철한 자기헌신이다.

모두가 누리는 권리를 위하여

그런 인재를 길러내고 그런 지도자를 선택할 줄 아는 국민이 되어갈 때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지진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며 붕괴의 충격을 이기고 일어서도록 해주는 정치를 일구어내는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런 정치를 요구하고 그런 정치를 감당할 만한 인물을 지도자로 올려 세워 훈련시켜나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의 책임은 어느새 우리 모두가 누리는 권리가 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