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가을, 평화의 가을

2010년 11월 23일 이후, 남한의 서해 군사 훈련과 북한의 연평도 공격이 한반도에서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사이,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불법적 개인 사찰 및 대포폰, 4대강 사업 반대로 상징되는 위기 정국이 전쟁 분위기에 모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국방비 증액 추진이 가속도를 타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방위산업체 관련 주가가 폭등하기도 했다. 연평도 위기가 전국을 강타한 바로 다음 날, 국회 심의에 들어간 국방예산은 올해 29조 5627억 원보다 5.8% 늘어난 31조 2795억 원으로 편성됐고, 마침내 11월 30일, 그보다 또 2.3%(7146억 원) 늘어난 31조 9941억 원 규모로 의결됐다.

그렇지 않아도 22조 2천억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4대강 사업으로 말미암아 교육 및 복지지출이 줄어들어 백성의 살림살이는 더욱 빠듯해지는데, 평화보다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지출인 국방비를 줄이지는 못할지언정 북한의 전쟁 위협이라는 이름 아래 계속 증액하니 설상가상이다. 이미 아이들은 공부 스트레스에, 어른들은 노동과 실직 스트레스에 심신이 지치고 있다. 남북 간 군사적 전쟁 정국이 결국 남한 내 기득권층이 풀뿌리 백성에 대해 전개하는 교묘한 사회적 전쟁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그렇다, 문제는 사회적 전쟁이다. 그 핵심은 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돈과 권력, 법과 제도라는 장치를 절묘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더욱 온존, 확장시키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이주민, 장애인, 학생, 어린이, 노인 등 사회적 약자는 물론 자연 생태계, 그리고 대부분의 중산층 이하 납세자와 시민들이 그 희생물로 전락한다. 그 사회적 전쟁의 전략전술을 교묘하게 만들고 관철하는 데에는 당연히 보수 언론과 교육, 종교가 앞장을 선다. 흔히 말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무한경쟁, 전쟁 위협, 경쟁력 강화, 선진국 담론 따위는 이 사회적 전쟁을 수행하는 필수 무기들이다.

이제, 사회적 전쟁으로부터 슬기롭게 빠져 나와 참된 사회 평화를 이뤄야 한다. 그러나 이 평화의 길은 멀고 험하다. 우선, 기득권 세력이 스스로 손아귀에 든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돈, 권력, 명예와 같은 기득권에 중독되어 있다. 그것을 끊는 순간 일종의 금단현상을 경험한다. 그래서 기득권을 잃을까봐 마냥 두렵다. 그런데, 과연 저 중간 및 아래쪽의 풀뿌리 민초들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그 대부분은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나마 열렬히 동경하면서 기득권에 중독된다. 자신이 오르지 못한다면 자식이라도 기득권층에 편입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사태가 이러니 기득권을 둘러싼 경쟁 체제, 그 경쟁의 배후에서 전체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는 결코 변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저 상층부의 기득권층에 별 기대를 걸기 어렵다면 기득권을 갖지 못한 대다수의 풀뿌리 민초들이 스스로 평화의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2010년 11월 26일 저녁, 나는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주최한 도종환 시인 초청 강연회 <시에게 길을 묻다>에 참여하여 ‘평화의 가을밤’을 만끽하며 몇 가지 단초를 얻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평화의 체제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길속에 있다. 도 시인은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이란 시를 인용했다. 그 시에 답이 나온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줄 안다/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상처가 나더라도 “남을 먹여 가며 사는” 일, 이것이야말로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둘째, 그러면서도 각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야 한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힘차게 말을 몰고 가다가도 몇 번씩이나 갑자기 말을 멈추고 휙- 뒤를 돌아다본다고 하지 않던가. 혹시라도 자신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까봐….

그렇다. 평화의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속도와 높이를 기준으로 한 경쟁을 당연시해온 우리 자신을 근원적으로 뒤돌아보아야 한다. 아니, 진정한 우리 자신의 내면과 친밀한 접촉을 해야 한다. 내면의 진실을 무시하고 외형적인 이미지에 경도된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삶의 질보다 경제 성장이나 소득 수준에 치우친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셋째,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처럼 “절망의 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조금씩 조금씩 “꼭 여럿이 손을 잡고 올라가는” 것이다. “절망을 붙들고” 더불어 갈 수 있을 때 마침내 우리는 전쟁의 담벼락을 넘어 평화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다. 그 어떤 비바람에도 아랑곳 않는 담쟁이 덩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