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산지 현상’과 취재원 비닉의 원칙

비밀 지키고자 하는 이들과 맞서는 핵심 현상 강상헌l승인2011.03.1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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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다쳐!’라는 코미디 대사는 실은 무서운 말이다. 튀니지 이집트 등 지중해 연안(沿岸) 아프리카 국가들이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바로 ‘알게 되어 벌어진 뜻밖의 사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 뒤집으면 ‘아는 게 탈’이란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다. 반면 ‘아는 게 힘’이란 말도 있다. 알아서 생기는 상황이 두렵다고 눈을 가릴 수는 없다. 알면 다친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알려고 한다. 그 욕구는 배고픈 것과도 같은 본능이다.

“거 봐, 나쁜 놈이잖아?”

어산지라는 좀 특별한 호주 출신 젊은 친구가 퍼뜨린 파일이 세상을 뒤집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세계의 거의 모든 언론 동네를 불난 호떡집처럼 만든 이 파일은 아직 종착역을 가늠해보기도 어려울 정도의 막강파워를 지닌 것 같다. 이를 어산지 현상이라고 불러보자.

오바마가 ‘나쁜 놈’이라고 했대서 어산지를 파락호 불한당쯤으로 간주(看做)해버리는 이들은 오늘의 이 주제, 어산지 현상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도 있겠다.

놀라운, 신기하고 재미난, 때로는 구역질나는 그 얘기들에 대해 세계의 ‘권력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그들이 말하는 방식이나 논리는 대략 ‘그 파일의 입수 경위가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정보가 사실이 아니거나, 중요하게 여길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좀 얼굴 뜨겁지만 빼먹을 수는 없는 얘기다. 어산지가 섹스 때 콘돔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아 법적인 추궁을 당하고 있는 점 때문에 ‘권력자’들은 “거 봐, 나쁜 놈이잖아? 성폭력 범죄자의 말인데, 어디까지 믿을래?”하고 짐짓 벼락을 치는 시늉을 한다.

미국이 사태 연결고리 역할에 미국 국민들까지 우려하는 상황

속내는 어산지의 파일이 심히 두렵다. 대놓고 ‘거짓이다.’라고 어산지와 마주 삿대질하는 이는 없다. 다만 줄기 대신 가지만, 지엽적(枝葉的)인 토픽만으로 세상의 눈과 귀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하는 안간힘만을 보여줄 뿐이다.

눈 흘겨봤자 그 뿐, 어산지 현상은 일파만파다. 그 충격파가 현재 가장 큰 곳이 아프리카 북부 아랍문화권인 것이다. 수십 년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뿌리까지 들썩인다. 어산지가 풀어놓은 팩트(사실)의 쓰나미는 살아 꿈틀거린다. 그 저력(底力)은 피를 부른다.

노벨상도 탄 오바마도, 남편보다 잘났다는 클린턴도 부끄러워 고개 제대로 들기 어려울 것이라고들 한다. ‘정의로운’ 세계의 경찰, 미국이 이런 놀라운 사태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까닭이다. 경제 말고도 미국의 정보와 외교활동이 청결(淸潔)하지 않다는 점에 미국 국민들까지 우려하는 상황이다.

궁금하다. 어산지가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았을까? 누구에게서 그 파일을 받았을까?

누가 그랬을 것이라는 얘기, 용의자가 누구라는 보도는 이미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용의자가 어산지에게 그 파일을 주었는지에 관한 어떤 확실한 정보도 없다. 어산지 파일을 보도한 신문들도 그 부분에 관해 별로 언급(言及)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산지가 누구에게서 그 파일을 받았는지 얘기할 성 싶은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최후의 보루이자 승부수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지점(地點)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폭로되어야 하는 비밀’을 전하고 있는 것

‘취재원 비닉(祕匿)’이라는,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낯선 이 용어는 언론 동네의 핵심 개념이다. 언론인이라면 모든 것,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이 취재원 비닉의 원칙이다. 이는 ‘필요할 경우’ 취재원(取材源)이 누군지, 내게 누가 그 얘기를 해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는 것, 적극적으로 숨기는 것을 말한다.

‘필요할 경우’라는 단서는 이 상황이 공익을 위한 것이면서, 밝혀질 경우 취재원이 위험이나 곤경(困境)에 빠지게 될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언론학은 이를 규정하는 여러 이론과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상식으로 풀면 더 쉽다.

자기가 가진 (위험하지만 비중 있는) 정보를 세상에 알리려고 기자를 찾을 때, 그(취재원)는 기자와 그가 속한 언론사가 자신을 확실히 숨겨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이 내용이 보도되고 충격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국가 권력을 포함한 관련자들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 또 그 내용을 부정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취재원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응해 취재원을 밝힌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

의당 그 기자와 그가 속한 언론사는 신제품 출시 보도자료와 같은 허접한 정보 말고는 앞으로 아무에게서도 중요한 제보(提報)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언론 존재의 뜻이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전체 언론에도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힌다.

‘성폭행 혐의’의 법 절차가 진행 중인데다 활동비도 거의 바닥났다고 한다. 그래도 어산지는 ‘원격조작 폭탄’인 비장(秘藏)의 파일의 암호를 깃발삼아 전 세계의 ‘어두운 비밀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과 맞서고 있다. 그에게 또 다른 누군가가 ‘폭로되어야 하는 비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산지가 취재원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도 충격적인 사실들을 폭로할 수 있는 기술과 전문적인 행동원칙을 가졌다고 세상의 많은 이들이 판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언론과 관련한 여러 주제의 명상 또한 ‘시민의 알 권리’가 화두

어산지는 현재진행형이다. 매 순간 현대사회의 지표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오늘 그에게서 끌어낸 주제는 현대의 언론을 움직이는 힘에 관한 것이다. 즉 언론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취재원 없이 존재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전제는 취재원 비닉이란 사실이다.

물론 코미디 대사처럼 다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 시민은 알아야 한다. 언론의 책무는 여기서 출발한다. 언론과 관련한 여러 주제의 명상 또한 ‘시민의 알 권리’를 화두(話頭)로 한다. 이 청년 어산지는 또 무엇을 생각하게 해 줄까?


강상헌 논설주간 / 우리글진흥원 원장

강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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