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적 시민사회’와 ‘예방적 시민사회’

상상을 넘어선 강력한 지진이 거대한 물살을 만들고 그 물살이 도시를 삼킨 지 일주일. 1만 5000명이 넘는 주민이 죽거나 사라져 버렸다. 끝없이 펼쳐진 폐허, 찾을 길 없는 가족과 이웃과 동료, 부족한 생필품으로 인한 허기와 추위는 대지진과 쓰나미가 남긴 일본 동북부의 참혹한 현실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되묻게까지 하는 이 처절한 대재앙 앞에서 집단 패닉의 상태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탐욕으로 혼란에 빠져드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누대에 걸쳐 지진과 화산이 삶과 함께 했던 일본은 달랐다. 가공할 대참사 속에서도 그들은 눈물을 감추었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가게에서 생필품을 구입하거나 구호품을 수령하는 긴 줄에는 동요하지 않는 강인함이 있었고 절제와 배려의 내면화된 규율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것은 곧 성숙된 시민의 덕목으로 세계인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일본 동북부의 대지진은 이 지역 후쿠시마 원전의 전력공급에 문제를 일으켜 사상 최악의 핵 방사능물질 유출을 우려하는 원전사고 상황으로 전환되었다. 후쿠시마 원전 가운데 4기에 이미 폭발과 화재가 이어졌고, 이제 간신히 전력복구가 된 듯 하지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가 공포의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기에 이르렀다. 일본 국민들의 인내와 절제도 간 나오토 총리체제와 도쿄전력의 무능과 무책임한 태도 앞에는 한계를 보이는 듯하다. 도쿄에서는 간 총리의 책임을 묻는 시위가 있었다.

나는 지진과 쓰나미 피해지역의 주민들이 보여준 절제와 배려의 미덕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 도쿄에서 정부의 무책임을 성토하고 피해지역에 대한 구호품의 빠른 공급을 촉구하는 시위를 보면서 일본의 시민사회와 한국의 시민사회, 그리고 고도의 '위험' 현실과 대면한 우리 시대 시민사회의 또 하나의 과제를 떠올려 본다.

이번 대재난에서 일본이 보여준 성숙한 시민적 덕목의 근저에는 오랫동안 자연재해와 함께 하면서 역사적으로 누적된 숙명론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전통적 운명주의를 기반으로 절제되고 인내하는 일본적 세계관은 규율된 시민사회를 만들었을 수 있다. 시민사회의 규율과 공동체 순종의식은 일본의 시민사회를 비판적이고 저항적이기보다는 정부에 협조적이고 공생하는 특징을 갖게 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특징은 공동체의 위험을 대비하는 민관일체의 매뉴얼사회라는 장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드러나듯이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위험사회에서는 준비된 매뉴얼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고도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예측불가능하다. 특히 우리시대가 직면한 핵 위험은 자연재해와 환경생태, 과학기술, 사람들의 가치관 등과 복합적으로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안전한 관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고의 파급효과 또한 현재의 지식체계로는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개별 전문분야에서는 일정한 예측성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지식은 위험을 진단하고 사회에 미치는 위험의 효과를 총체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세분화되어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이다. 따라서 무엇을 위험이라고 하고 그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사회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도 위험사회의 시민적 공론장이 갖는 의미가 강조된다.

잘 규율화 되고 수동적 시민사회의 공론장은 고도 위험사회의 문제해결에 더 이상 적응력을 갖기 어렵다. 거대한 재앙이 닥친 후 보여주는 시민적 미덕도 중요하고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만드는 '예방적 시민사회'를 갖추는 일이다. 고도 위험사회에서 예방적 시민사회는 위험현실과 관련된 '진단'과 '처방'의 담론이 규제없이 소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위험에 관련된 정부와 시장(기업)의 시각과 가치관, 관리방식에 대한 비판적 공론장이 필수적이다.

일본의 원전사고를 보며 최근 우리 시민사회에서 ‘조용한 시민사회’를 강요하는 저간의 흐름이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 경부고속철 건설과 천성산 생태파괴 문제, 국내 원전 문제 등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들어 그간의 논쟁과 담론이 소모적이고 무의미했다고 말하는 정부와 일부 언론의 태도에는 고도 위험사회에 대한 감수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고도 위험사회에서는 위험에 대한 진단과 처방의 담론도 고도화된 예방적 시민사회가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