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제물, ‘박정희 굿판’을 거둬라"

새마을과 ‘박정희교’의 번성에 대한 소고 이명재l승인2011.05.24 15:30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새마을 운동의 날’ 국가기념일로 지정…역사라기보다는 ‘신화’ 영역 돼 버린 느낌 ‘씁쓸’
마을 혁신 아닌 파괴·농촌 공동체 와해로서의 폭력성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필요
“식민지·해방·전쟁·전후 근대화라는 긴 농촌 사회 변화에서 이미 운동 발전동력 키워와

5·16 쿠데타 50년을 맞아 벌어진 박정희 추앙 열기는 박정희의 망령이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보하며 군림하고 있음을, 아니 갈수록 그의 존재가 더욱 신화의 영역으로 ‘승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지금 박정희의 망령은 현존 인물 이상의 신령이 돼 살아 있다.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없더라도 이미 사당 없는 사당들이 즐비하며, 그를 교주로 받드는 십자가 없는 교회들이 무수하며, 보이지 않는 동상들이 곳곳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성장은 곧 토건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부자 되세요’라는 신흥 주술의 유행에서, ‘하면 된다’는 해묵은 구호의 건재에서 우리는 박정희의 소리없는 육성을 듣고 있다. 빵과 재물을 얻으면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천박한 물신주의에서 방울을 흔들며 주문을 외는 박정희의 굿판을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상 유례없는 천박한 정권의 출현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박정희 현상’의 결과일 뿐이다.

스스로 박정희의 자발적 포로가 돼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 현상

심각한 것은 박정희 망령이 우리의 골목, 일상에까지 더욱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새마을’이라는 간판을 단 식당이 성업중인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스스로 박정희의 자발적 포로가 돼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를 본다.

박정희 현상을 접할 때 나는 김영삼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한국 현대사의 유명한 인물들 중에서 불가사의한 인물을 꼽으라면 김영삼 전대통령을 들고 싶다. 그건 최근 그의 언행을 보고 들으면서 드는 생각인데 그의 말이나 행태는 이른바 ‘존경할 만한 전직 대통령’의 부재를 아쉽게 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양식과 교양을 의심케 하는 수준이다.

4월 22일이 새마을 운동의 날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새마을운동의 날 제정은 종교 아닌 종교 ‘박정희교’가 더욱 번성토록 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만큼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에 의한 농촌 근대화 운동의 중요한 업적이자 한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진은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Y-SMU 포럼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있는 모습이다.
불가사의란 이런 이가 어떻게 대통령이 됐는지,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야당 지도자로 수십년 간을 한국 정치를 이끌어왔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인물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맞수로 대접했다는 점은 그의 과욕을 넘어서서 한국 정치계의 불가사의이며 나아가 괴이한 일이라고까지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 대한 실망을 얘기하고픈 생각은 별로 없는데 결국 반성해야 할 것은 그를 키워준 국민들의 안목이며 한국 정치의 실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김영삼씨의 최대 과오가 무엇인지에 대에 얘기하고픈 게 있을 따름인데,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의 가장 큰 실정은 외환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이를 그의 책임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죄하기에는 그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다. 수십년간의 누적된 모순이 그에 와서 폭발한 것이랄 수 있기 때문에 외환위기 사태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지우는 건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영수회담 가진 김영삼은 왜 침묵했을까?

그보다 내가 진정 그의 과오라고 하고 싶은 것은 그로 인해 한국 사회에 ‘박정희’를 되살려낸 것에 있다. 외환위기가 그 중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능과 과오로 무덤 속에 누워 있던 ‘박정희 귀신’을 불러냈다. 그를 복권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거에 추악한 독재자에서 영웅으로 올려놓았다. 유신 반대 투쟁이 달아오르던 75년에 박정희와 영수회담을 가진 뒤 석연찮은 침묵으로 박정희를 살려 준 그가 사후의 박정희를 다시 한 번 살려준 것이다.

이렇게 일본군 중위 다카기 마사오는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독립군을 때려잡는 충성스런 황군 장교, 일본 천왕에게 피의 맹세를 바친 황군 장교 박정희는 구국의 영웅으로 살아났다. 대통령 선거 때 경쟁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겠다며 일요일에 모든 공무원을 가족 야유회로 징발하고, 예비군을 소집하고, 모든 고궁과 극장을 무료로 개방하는 치졸한 꼼수를 부린 ‘찌질한’ 인간은 화려하게 부활했다(<김대중 자서전>에서).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의 영역이 돼 버린 박정희 신드롬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 ‘새마을 운동’의 주창자로서의 박정희에 대한 미화를 빼놓을 수 없다. 마침 ‘새마을 운동의 날(4월 22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고 하니 바야흐로 각종 ‘새마을 사업’은 더욱 날개를 달게 될 듯하다.

우리의 골목길 안에 더욱 많은 '새마을'이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새마을운동이 박정희의 신화를 더욱 단단히 구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새마을운동의 날 제정은 종교 아닌 종교 ‘박정희교’가 더욱 번성토록 할 것이다. 그만큼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에 의한 농촌 근대화 운동의 중요한 업적이자 한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가령 2007년 서울경제신문과 한국리서치가 ‘정부수립 이후 국가발전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건’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새마을 운동(46.3%)은 압도적인 지지로 1위에 올랐다. 올림픽 (18.6%)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10.2%)을 크게 앞지르는 수치였다.

일제강점기 농촌진흥운동인 심전개발운동에서 황국신민화작업까지를 주목해야

나는 이런 현상들이 두 가지의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본다. 첫째, 새마을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둘째, 새마을운동이 만약 성공적이었다면 이는 박정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여기서 짧은 지면에 다루기는 힘든 주제이며 좀 더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다만 새마을운동이 성공을 거둔 측면이 있다고 설령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내재된 어두운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마을’의 혁신이 아닌 ‘마을’의 파괴, 농촌 공동체의 와해로서의 새마을 운동의 폭력성이다.

4대강이 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강을 죽이고 있듯 새마을운동은 새 마을을 만들겠다며 실은 마을 공동체를 죽였다. 신경림 시인은 <민요기행>에서 그 새마을로 바뀐 마을의 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80년대 중반 민중 생활의 소중한 자산 전통인 민요를 채록하고 녹음하러 갔을 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이장은 전화 받으라는 소리에 연신 방을 들락거렸다. 지서에서 누가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묻는 전화가 자꾸 걸려오는 것이었다. 주민들로부터 신고도 들어오고 게다가 사진 기자가 사진을 찍다가 걸리기까지 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이름과 직업만 대었다가 다음에는 주소와 주민등록증 번호까지 대었으나 지서에서는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 마침내 이장이 인사까지 끝내고 나오는 우리들을 동구 밖까지 뒤쫓아와서 우리들의 한문 이름까지 적어가는 곤욕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새마을’의 한 풍경이었다. 이같은 농촌의 모습에서 박정희가 그렸던 ‘새마을’의 한 면모가 드러난다. 이는 그가 새마을 운동의 모델로 했다는 혐의를 받는 운동을 통해 설명된다. 바로 1930년대 일제가 조선 농촌의 좌익화를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벌였던 조선농촌진흥운동이었다.

도시의 비공식 저임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농촌 붕괴의 가속화 작업

조선농촌진흥운동은 1932∼1940년간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진행된 관제 농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농촌경제의 몰락에 따른 사회불안을 억제하고 각종 농민운동의 활성화를 통제하는 한편,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앞두고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작쟁의와 사회주의계의 적색 농민조합운동이 조직적인 양태를 띠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종교계와 언론계를 중심으로 한 개량주의적 농촌계몽운동도 일제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1932년 7월부터 농촌사회의 제어를 통한 식민지 지배체제의 안정을 목표로 이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1935년 농촌진흥운동은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을 전개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전국 농촌의 각종 농민운동이 1935년을 전후로 소멸 혹은 관제화함으로써, 전쟁동원을 위한 농촌의 재편성과 농민층에 대한 황국신민화작업이 주요 목표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신앙심 ·국가의식 ·사회공동체의식의 함양을 의미하는 심전개발은 곧 ‘충량한 황국신민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고도의 이데올로기 정책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시기의 농촌진흥운동은 조선적인 것의 말살과 전시동원 협력체제의 극대화를 위한 것이었다(네이버 백과사전).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에 대해 우리가 비판할 게 있다면 그건 무엇보다 그가 농촌에 ‘새 생명’을 주겠다며, 농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겠다며 농민으로 하여금 자기 부정, 자기 비하에 빠지게 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그는 농촌 사회의 저발전을 농민 탓으로 돌렸다.

농민이 미신과 게으름, 노름 등에 빠져 스스로 발전하려는 노력을 등한시함으로써 농촌이 낙후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새마을은 농촌의 혁신이 아닌 농촌과 농민의 삶에 대한 모욕이며 도시의 비공식 저임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농촌 붕괴의 가속화 작업이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는 이 점을 제대로 살펴야 할 것이다.

상명하복식 구조에서 자조는 박정희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농촌 개조 의미

두 번째 새마을과 박정희의 관계다. 지금 새마을은 (만약 성공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면) 철저히 박정희의 업적으로 선전되고 있다. 새마을운동중앙회의 홈페이지는 새마을 운동에 대한 소개에서 “1970년 초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된 운동”으로 얘기하고 있다. 이 소개에서 박정희는 “향약에서 민중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협동체를 발견했으며”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한” 인물로, 그래서 새마을 운동의 시작과 끝이 모두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김영미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그들의 새마을운동>이라는 저서에서 새마을운동을 농민의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이같은 시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평가는 가장 중심이 되어야 했으나 뒤편으로 밀려난 농민들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인식이나 해당 시기 농촌 사회의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 책은 두 주인공의 삶의 여정을 다룬다. 새마을운동 시기 ‘자립마을’로 두 차례나 선정되어 상을 받은 이천 지역의 한 ‘마을’ 아미리, 그리고 새마을운동의 ‘기수’로서 〈대한뉴스〉에 보도된 한 ‘농촌운동가’다. 저자가 재구성한 새마을운동 시기 농촌 사회의 역사상은 농촌 근대화를 위한 자발적 노력들이 끊임없이 시도되는 모습이었다.

이 책은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의, 박정희에 의한 운동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마을 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정부의 신화가 아니라 농민과 농촌 사회의 역사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시기부터 식민지·해방·전쟁·전후 근대화라는 긴 농촌 사회의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이미 새마을운동은 그 발전동력을 키워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부의 새마을운동이 있기 이전에 이미 농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새마을운동이 있었다. 박정희가 한 것은 이미 ‘새 마을’로 성공적으로 변화한 마을들의 운동을 국가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제 때의 조선농촌진흥운동이 의도했던 농촌의 정치적 통제 전략이 숨어 있었다.

박정희는 농촌 마을에 대한 지원 기준으로 ‘자조’를 우선으로 했는데 박정희가 언급한 자조는 단순히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고 김영미 교수는 지적한다. 이는 국가가 인정하는 방향으로의 발전을 뜻했다. 자조와 함께 강조된 ‘지도’만 보더라도 이는 잘 알 수 있다. 국가 지도자로서 ‘각하’, 그 하부에 새마을지도자들이 존재하는 상명하복식의 구조 속에서 자조는 박정희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농촌 개조를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은 설혹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하더라도 박정희 신화 만들기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새마을운동의 이념을 전파하고 이의 현대화를 주도하는 새마을운동 조직도 더 이상 새마을의 이름으로 새마을을 왜곡하고 독점해서는 안된다.

현재 새마을운동 회원은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넘는다. 이 중 운동을 주도하는 새마을 지도자, 새마을부녀회 지도자는 17만8000여 명이라고 한다. 회원만 놓고 보면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민단체다. 17개 시·도 지부와 232개 지회 등 전국에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민주화에 대해 민주주의는 혼란과 갈등?

그러나 새마을운동 중앙회의 홈페이지는 단체가 균형잡히고 건전한 양식을 가진 단체인지에 대해 의심케 한다. 가령 이 단체는 민주화에 대해 민주주의는 혼란과 갈등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90년대 초기 민주화·개방화 흐름에 따라 사회 곳곳에서 자기 몫을 챙기겠다는 지나친 이기주의와 탈법·불법, 무질서, 과소비가 판을 치면서 사회적 갈등이 빚어졌다.” 연간 수백억의 국고가 지원되는 법정 단체 3개(다른 두 개는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자유총연맹)중의 하나인 이 단체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국민들의 나태함과 이기심에서 찾고 있다.

“대충대충하는 적당주의, 왜곡된 교육열, 무조건 쓰고 보자는 과소비, 일확천금을 꿈꾸는 한탕주의, 빨리빨리 조급증 등을 총칭해서 일컫는 한국병 이란 말이 유행되었고 근로자들이 힘든 일, 궂은 일,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풍조를 두고 이른바 3D현상이란 새로운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새마을의 이름으로 박정희를 끊임없이 불러내는 것,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새마을’을 두 번 죽이는 것이며, 우리의 농촌을 모욕하는 것이다. 새마을을 제물로 하는 ‘박정희 굿판’을 당장 거둬라.(필자 주: 이 글은 <한겨레> 훅에 실렸던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명재 언론인, 전 인권위 인권연구팀장

이명재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명재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