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非우연이 같다?

지록위마(指鹿爲馬) 국립국어원 강상헌l승인2011.06.1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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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연히 만난 사람을 오늘 우연찮게 다시 만났다.’

‘우연’이란 말이 둘 들어가는 이 글월을 써놓고 곰곰 들여다본다. 독자 여러분도 함께 봐주시면 좋겠다. 형용사 부사 접미사 따위의 문법 요소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연(偶然)은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뜻밖에 저절로 되는 일’이라는 뜻이다. ‘우연의 일치’처럼 쓴다. 반대의 뜻을 가진 낱말은 ‘사물의 관련이나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의 뜻인 필연(必然)이다.

‘우연하다’는 ‘어떤 일이 뜻하지 아니하게 저절로 이루어지다’는 뜻이다. ‘우연한 발견’과 같이 쓸 수 있다. 그러면 ‘우연하다’의 반대되는 말은? ‘우연하지 않은’ 즉 ‘우연찮은’이다. 다른 말로는 ‘필연적’ 또는 ‘의도적(意圖的)’이다. 사전의 설명이다.

일부 사람들이 입말[구어(口語)]로 쓰곤 하는 ‘우연찮다’는 말은 상당한 혼란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 ‘우연하다’의 반대인 ‘우연찮다’가 ‘우연하다’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우연하지 않다’ ‘우연치 않다’의 준말이다. ‘우연(偶然)+하-+-지+아니+하-’로 구성된다.

글 앞머리에 적은 글월을 톺아보면 그 차이는 확실하다. 며칠 전에는 오다가다 만난 것이었지만, 오늘 그 사람을 다시 만난 것은 (하늘이 예정해 둔) 필연적인 것이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심심하다’의 반대 짝은 ‘심심하지 않다’ ‘심심찮다’다. 놀 것, 볼 것, 만날 사람 많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것이 심심찮은 것이다. 그런데 ‘우연하다’와 ‘우연찮다’는 같은 말로 쓰인다고 한다.

KBS라디오가 ‘바른말 고운말’ 프로그램에서 이 말을 다뤘다. 널리 쓰이는 ‘우연찮다’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이 설명하는 것과 같이 ‘우연하다’와 같은 뜻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영방송이 언어관장 국가기관을 인용해 ‘우연찮다’와 ‘우연하다’는 같은 말이라고 확인한 것이다.

다음은 국립국어원이 ‘우연찮다’는 말을 설명한 내용이다.

“...오늘날 흔히 '우연하게, 우연히'라고 말해야 할 자리에 사용되고 있는 '우연치 않게, 우연찮게'는 부정 표현과 긍정 표현 사이에 의미의 이동이 나타나고 있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다.'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우연찮다'를 표준어로 보고, 표제어로 싣고 있습니다. 단어의 쓰임에 대한 판단은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게'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우연찮다'의 활용형 '우연찮게'를 쓸 수 있습니다. (용례: 그는 이번 사건에 우연찮게 연루되었다.)...”

‘의미의 이동(移動)’이라고 설명했다. 비유와 상징으로 말하자. 그 설명에 견주면 ‘착하지 않은’ 것과 ‘착한’ 것은 같다, 그래서 ‘착하다’고 써야 할 때 ‘착하지 않다’고 써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심심찮은’ 것이 ‘심심한’ 것과 같다? ‘거짓’과 ‘진실’은 같다? ‘악마’는 ‘천사’다? 자못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스스로 ‘단어의 쓰임에 대한 판단은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라는 끄트머리를 달아놓긴 했지만, 이는 ‘견해’의 차원이 아니라 ‘과학’과 ‘학문’의 기준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단서대로 생각하더라도, 누가 어떤 견해로 이런 엽기발랄한 판단을 내려 나랏말의 기틀인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렸는지 의아한 느낌이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권력자가) 사슴[鹿]을 가리키며 말[馬]이라고 한다.’는 뜻인데, 그 말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렇군요, 좋은 말이군요.’했다는 것이다. 다수결로도 사슴을 말로 바꿀 수 있을까? 100명 중 51명이 찬성하면 사과가 바나나로 변신할까?

일본인들 욕설인 ‘바가야로’(馬鹿野郎)는 ‘이 바보야!’하는 뜻이다. 말과 사슴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면 ‘바보’다. 이유 없는 무덤이 있던가?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권력(權力)추종형도, 다수(多數)추종형도 결국 다 바보로 드러난다. 역사도 이를 가르쳐준다.

‘여러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그 말도 맞다고 치자.’는 식의 국립국어원의 우물쭈물한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슴을 말로 바꾸는 일처럼 보인다. 적절한 논증의 절차나 토론이 있었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다.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바꿔 부르자는 판단과는 다른 것이다. 무신경하거나, 혹은 독단(獨斷)이 지나치다 할 수도 있겠다.

점성술사나 정치가들에게는 ‘이유’ 또는 ‘대의명분’이 있다. 학자 또는 연구인들은 당연히 학문적인 설명을 앞세워야 한다. 왜 반대말인 ‘우연찮다’와 ‘우연하다’가 같은 말인지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은 권력기구이기 전에 학술기구일 터다.


강상헌 논설주간,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강상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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