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배려를 애타게 비는 인간의 모습

한자숲 노닐기- 여름 하(夏) 강상헌l승인2011.07.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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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상(凍傷) 생채기 채 가시지 않은 대지에 또 다른 얼굴 씌워

여름, 생명력의 시기입니다. 산야(山野)는 바야흐로 초록(草綠)으로 뒤덮이지요.
퍼붓는 뙤약볕, 억수로 쏟아지는 비, 산과 들을 뭉개버리는 수마(水魔)의 잔치, 자연의 이런 작용은 얼어붙었던 겨울의 동상(凍傷) 생채기 채 가시지 않은 대지(大地)에 또 다른 얼굴을 씌웁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모든 생장점을 간지럼 태워 크고, 길고, 짙고, 많게 하는 것이지요. 주체 못 할 만큼 힘 넘치는 계절, 여름입니다.

갑골문 금문(金文) 등에 등장하는 여름 하(夏)의 옛 글자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한축인 여름 夏의 ‘중심 세력’은 역시 물[水(수)]입니다. 물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으면 여름의 본디가 깨어나지 않습니다. 가뭄귀신 한발(旱魃)님이 심심했던지, 자신을 심심하게 한 인간들에게 뿔이 났던지 비 머금은 구름을 거둬버렸습니다.

문자의 새벽, 갑골문 시대를 살던 옛사람들에게 이 가뭄처럼 두려운 일이 또 있었겠습니까? 메마른 대지에 흙을 쌓아 귀신을 만나기 위한 제단(祭壇)을 세웁니다.
‘뿌리 깊은 나무’로 시작하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원본의 일부분.

그 단을 시(示)라고도 했습니다. 그 위에서 손을 들어[又(우)] 갓 잡은 희생물(犧牲物)인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의 고기[肉(육)]를 신에게 보입니다. 제(祭) 자의 속뜻입니다. 示는 신(神)에서처럼 ‘귀신’ 관련 글자에 쓰입니다. 又 자는 ‘손’을 그린 것입니다. 달 월(月) 자를 눕힌 것 같은 글자는 고기 肉 자의 변형(變形)입니다.

큰 제사(祭祀), 비[雨]를 비는[祈] 기우제(祈雨祭)지요. 아마 무리의 우두머리가 제사를 주관(主管)했을 것입니다. 가장 크고 화려한 관(冠)과 옷, 그리고 신발로 잘 차려입은 제사장이 두 손을 모아 “비를 내려 줍소서!” 간절히 빕니다. 여름의 본디이자 생명력의 바탕인 비를 갈구(渴求)하는 그 모습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 것이 여름 하(夏) 글자입니다.

夏는 머리 혈(頁), 절구 구(臼), 천천히 걸을 쇠(?) 세 글자의 뜻을 합친 회의(會意)문자라고 사전은 풀이합니다. 頁은 관(冠)이나 탈을 쓴 사람의 머리입니다. 속을 우묵하게 만들어 곡식을 빻거나 찧으며 떡을 치기도 하는 절구 臼는 그 글자 모양 때문에 ‘깍지 낀 사람의 양쪽 손’ 즉 기도하는 손이라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는 춤추는 것과 같은 발(다리)의 동작입니다.
관(冠)이나 가면(假面), 옷, 신발 등 화려한 복식으로 성장(盛裝)한 제사장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 갑골문의 夏자(진태하 교수 書)와 중국 문헌의 제사 제(祭)자 갑골문.

물론 지금 보는 글자나, 갑골문 이후의 옛글자들은 수천 년 갈고 닦인 도안(圖案) 즉 디자인입니다. 그 글자의 원형(原型) 즉 프로토타입(prototype)과 ‘현대의 기호’인 여름의 지금 모습 夏를 비교해보시지요. 어느 시기엔가 ‘기도하는 손’의 모습이 사라졌군요.

오지 않는 비를 애타게 바라는 모습의 그림인 여름 夏, 대조적으로 많은 비가 대지를 뒤덮어 난리(亂離)가 나는 계절도 여름입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알려진 하(夏) 상(商) 주(周) 3국의 첫째인 夏나라의 건국 유래 또한 비[雨(우)]와 얽혀있습니다.

황하 유역(流域)의 작은 나라 우두머리 우(禹)가 홍수(洪水)를 극복하는 등 물을 잘 다스린 치수(治水)의 공덕(功德)을 인정받아 더 큰 나라의 우두머리 순(舜)으로부터 왕위(王位)를 물려받은 후 이를 토대로 세운 나라가 夏나라입니다. 이상적인 제왕(帝王)의 모델로 일컬어지는 요순(堯舜)시대의 후계인 셈이지요.

이 夏나라는 439년간 존속하다 기원전 1600년경 탕(湯)이 이끄는 상(商)나라에 망합니다. ‘요-순-우-탕’으로 이어지는, 신화(神話)와 함께 헝클어진 고대 중국 역사의 줄기입니다. 은(殷)이라고도 부르는 商나라는 갑골문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시기로 친숙한 이름이지요.

비를 기원하는 고대 임금(제사장)의 모습이 여름 글자 夏이며, 비가 많이 와서 난리가 난 세상을 잘 아우른 덕목(德目)으로 세워진 나라 이름이 夏이니 좀은 아이러니컬하군요.

불교에서는 夏를 안거(安居)라고 하여 스님이 여름철 일정 기간 외출하지 않고 수행(修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안거라고도 하지요. 스님의 출가(出家) 이후 나이[하랍(夏臘)]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랍(臘)은 섣달 즉 음력의 마지막 달을 말합니다. ‘춘추(春秋)’가 한 해 즉 1년을 가리키는 것과 흡사하군요.
용비어천가 ‘꽃 좋고 열매 많다’의 옛 글자는 ‘곶 됴코 여름 하다’입니다. 고대 우리말 ‘하다’(많다)가 ‘여름 夏’의 연관은 어떤 것일까요? 夏 자도 ‘많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의 공동의 문자와 지금 우리 삶의 바탕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이렇게 또렷합니다.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의 맥락(脈絡)이라고나 할까요? 맥락은 영어로 콘텍스트(context), 요즘 흔히 말하는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요소지요.
B.C 26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중동) 설형(楔形 쐐기모양)문자. 농업과 토지, 세금 따위가 내용이다. 어느 지역의 문명이건 옛날 문헌은 주로 풍년의 기원 등 ‘민생(民生)’을 우선적으로 다뤘다.

<토막해설>하로동선의 ‘정치적’ 모순

여름 화로(火爐)와 겨울 부채인 하로동선(夏爐冬扇), 쓸모없는 사물이나 인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내역(內譯)을 보면 위의 ‘뜻’과 거의 거꾸로의 뜻이 된다.
중국 후한(後漢) 사람 왕충(王充)이 ‘논형(論衡)’이란 글에 쓴 내용, 여름 화로는 젖은 것을 말리는데, 겨울 부채는 불씨를 일으키는데 쓸 수 있는 바,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이 어디 있겠느냐는 주장이다. 같은 약(藥)도 쓰는 이에 따라 복(福)도 되고 독(毒)도 되는 것이다.
학문 높고 뜻이 깊은데도 인연이 닿지 않아 불우한 상황에 있는 인물을 세상이 왕따시키는 것을 비웃으며, 오로지 우두머리의 취향으로 신하(臣下)의 처지가 결정되는 것을 경계(警戒)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意圖)와는 달리 이 말은 표면적 의미로만 주로 쓰인다. 그래도 하로동선은 쓸모가 있다. 말은, 속뜻을 헤아려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런 사려(思慮) 깊은 자세가 지혜(智慧)다.


강상헌 논설주간/(사)우리글진흥원 원장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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