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정치? 생뚱맞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열기가 뜨겁다. 오랫동안 시민운동과 공익재단활동에 헌신했던 박원순 변호사가 야권단일후보로 나서서 선거전에 땀 흘리는 모습이 자못 안쓰럽기도 하다. 이번 선거에서는 두 후보가 모두 시민의 일상을 편안하게 하겠다며 '생활'모드를 강조하니 나쁘지 않은 방향인 듯하다.

그런데 박원순 후보는 시민의 일상적 삶에 늘 함께 한 분이니 새삼스러울 것이 없으나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가 '생활특별시'를 구호로 삼은 것은 다소 생뚱맞은 일일 수도 있다.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오세훈 전 시장과 특별히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지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는 "오세훈 시장을 계백장군처럼 혼자 싸우다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까지 나섰던 나 후보가 '생활'개념을 들고 나오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특별시라는 말 앞에 "골목까지 섬세하게 챙기는"이라는 수식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며칠 전 나경원 후보는 생활 공약으로 이른바 '생활약속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버려진 쓰레기와 시설물 소음, 생활악취, 음란유해 광고물, 길거리 흡연 등 5대 생활 공해를 없앰으로써 불편, 불안, 불쾌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생활정치'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크다.

생활정치는 후기 근대의 새로운 사회운동을 설명하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사회과학적 족보를 가진 개념이다. 생활정치는 일상에서 나타나는 생활주변의 일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 본질은 강제적 '국가'나 경쟁적 '시장' 등 근대성의 핵심제도에 의해 억압된 삶의 도덕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들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생활정치는 주체적 삶의 구성과 관련되어 있고 삶의 방식과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선택의 정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환경, 여성, 평등, 인권, 반핵, 복지, 소수자 등의 이슈로 시도되는 시민운동의 정치야말로 생활정치의 가장 핵심적 내용이 되는 것이다. 본연의 생활정치가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구성하기 위한 시민운동이라고 한다면 나경원 식 생활정치는 일종의 '환경미화정치'에 그친다는 느낌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시민운동은 다소 중첩되지만 서로 다른 세 가지 유형으로 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990년대 정치경제개혁운동을 넘어 '생활정치운동'이 주류화되는 경향이 하나이고, 다양한 형태의 '뉴라이트' 운동과 같은 '이념정치운동'의 흐름이 다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 생활정치운동이나 이념정치운동과 일부 중첩되면서도 선거정치나 정당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정치참여운동'의 흐름이 있다. 2000년 낙천낙선운동이래 2012년 선거에서 야권연대를 도모하는 다양한 운동네트워크들이 그런 범주에 든다. 2000년대 이후 시민운동은 이처럼 생활정치운동과 이념정치운동 그리고 정치참여운동이라는 새로운 분화경향을 보였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의 출마선언 후 보수진영의 시민사회에서 이석연 씨가 출마를 선언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주요 축은 뉴라이트 관련 시민단체들이었다. 뉴라이트 계열의 단체를 비롯한 보수진영의 시민단체는 대체로 시민의 삶에 관한 정치보다는 국가정체성이나 반북 자유주의이념을 제고하는데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점에서 보수진영의 시민운동은 이념정치운동 혹은 '국가주의 정치운동'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명확히 하자면 이석연 후보를 추대한 보수쪽의 시민단체들은 이념정치에 기반을 둔 '정치참여운동'의 한 흐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석연 씨가 출마를 포기한 후 보수적 정치참여운동 그룹은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나경원 후보는 한나라당과 보수시민사회의 이념정치 위에 굳건히 선 셈이다. 후보 토론 때 마다 천안함 사태에 대한 생각을 집요하게 묻는 나경원 후보에게 서울 시정과 천안함이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지만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이념정치와 국가주의정치를 잊지 않는 총명함을 보이는 일이다. 적어도 이념과 국가주의 정치의 틀로 주조된 나경원 후보의 생활정치가 '환경미화정치'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돌이켜 보면,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어김없이 재현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구도를 일반적으로 동등한 이념적 대당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시민사회는 보수진영의 이념정치와 진보진영의 생활정치로 뚜렷이 분화되는 모습을 드러냈다. 시민운동의 역사적 맥락으로 보자면 생활정치는 이념을 넘어선 가치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관계는 이념적 대당이 아니라 '이념정치'와 '생활정치'의 비대칭적 구도에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역사 퇴행적 이념정치와 역사 주도적 생활정치가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선거로 보자면 나경원식 생활정치의 속살은 이념정치일 수밖에 없지만, 이에 비해 박원순의 정치는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그의 이력에서 보듯이 정확히 생활정치에 기반을 둔다고 말할 수 있다.

박원순의 등장을 '바람'의 정치라고 표현하는 데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원순의 생활정치는 1990년대 정치경제개혁운동을 넘어 지난 10여 년간 시민사회에서 주류화된 생활정치운동에 기반을 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턱에 차오른 시민적 갈망의 표현이자 시민사회에 형성된 새로운 삶의 질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원순은 바람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가야할 '길'이다. 우리사회의 새로운 선택과 새로운 질서를 향해 도도히 굽이치는 '강'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