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정치’ 메가트렌드 입증

2011년 서울의 가을을 뜨겁게 달궜던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박원순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지난 석 달 동안 한국정치는 예기치 않은 격동과 격변을 경험했다. 8월 1일 오세훈 전 시장의 주도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발의된 것에서 출발하여, 8월 24일 주민투표에서 여권의 패배, 오세훈 전 시장 사퇴, 9월초 안철수 원장의 등장,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의원 압도, 9월 6일 안 원장의 박원순 후보 지지 기자회견, 10월 3일 야권단일후보로 박원순씨 결정, 그리고 10월 26일, 마침내 박원순 후보는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이 일련의 사건 전개에는 많은 불확실성과 운명적 요인들이 개입했다. 하지만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48.6%의 높은 투표율, 53.4%의 득표율로 7.2%라는 상당한 격차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기에 이른 것은 결코 일시적인 바람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와 정치의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사건이며, 또한 21세기 정치의 지구적 변화 추세를 선도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 정치 변동이라는 일국적 맥락에서 보자면, 이번 선거는 이미 2000년대 초반에 본격화된 시민사회의 정치적 활동성 증대가 맺은 하나의 결실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2002년은 특별한 해다. 붉은 악마, 미선효순 추모 촛불집회, 노사모 운동이 모두 이 해에 일어난 사건이다. 세 사건의 맥락과 내용은 같지 않지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자생적 자기동원, 집단행동의 확산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새로운 사회현상은 2004년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거쳐, 2008년 미쇠고기 수입협정 반대 촛불집회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하의 크고 작은 저항행동들(방송장악 반대, 민영화 반대, 반값등록금, 희망버스 등)에서 점점 일상화되고 보편화 되어갔다.

이런 시민행동들은 그 자체로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정치적 목표를 갖지도 않았고, 그 참여자들 역시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명명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행위의 의미와 결과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이었다. 2002년 촛불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하나의 중요한 힘이었고, 2004년 촛불은 탄핵을 무마시키고 곧 이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일순간에 과반수 의석을 얻는 데 기여했으며, 2008년 촛불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시민사회의 생명력을 이어갈 수많은 정치적 주체들을 탄생시켰다. 그 시민적 정치주체들은 2010년 6?2 지방선거를 비롯한 지난 몇 년 간의 여러 선거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서울시장 박원순’의 탄생은 그와 같은 한국 시민사회의 장기적 변화 추세 속에 놓여 있는 사건이다. 박원순 후보가 ‘시민후보’라 함은 단지 시민단체의 후보, 시민운동 진영의 후보를 의미할 수 없다. 박원순 후보를 세운 것은 시민들의 힘이었다. 후보단일화 경선 당시 지하철역에서 끝도 없이 밀려나오던 젊은 시민들, 선거전이 개시된 후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의 거짓선전과 혈전을 벌인 네티즌과 트위터리안들, 선거 당일에 하루 종일 투표를 호소하며 애태웠던 시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원순씨의 시장 당선은 시민운동, 시민단체의 정치세력화와 전혀 무관하다. 시민단체들은 앞으로도 권력기구가 아닌 권력감시기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정치세력화된 것은 바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러나 정치권력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가진, 한명 한명의 시민들이다.

나아가 박원순 후보의 서울시장 당선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단지 무소속 시민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한 사례가 드물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21세기 정치의 대전환, ‘시민정치’라는 메가트렌드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의정치와 정당조직이 견고하게 발전된 선진 민주주의 사회들에서도 심대한 정치 변동이 진행되고 있다. 정당에 대한 충성도는 약해지고 있고, 정당체제는 점점 더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 변화를 움직이는 힘은 시민정치다. 이번 선거는 그 힘의 분명한 실체를 한 나라의 정치적 중심부에서 제도적으로 확인시켜준 초유의 사건이다.

많은 민주주의 사회들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표현과 참여는 점점 더 적극적으로 되어가고 있고, 정부.정치.정책에 점점 더 깊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길 원하고 있다.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몇 년에 한 번 통치자를 뽑고, 다음 선거 때까지 그가 무엇을 하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명목적 주권자로 남아있길 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적잖은 경우에 이처럼 활동적인 시민행동은 모든 기존 정당들에 대한 과장된 불신,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선거정치의 거부를 동반했다. 그런 태도는 문제의 근원이 되는 사회구조와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아가 종종 정당체제 내에서 보수 정치세력의 힘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시민정치를 경계하고, 정당정치에 대한 위협으로만 간주하는 우려의 시선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사례는 다르다. 자발적.자생적인 참여행동에 적극적인 시민일수록 오히려 정당개혁과 선거정치에 더 적극적이다. 시민정치는 정치개혁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그런 특성은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시민후보’를 명실상부한 ‘야권단일후보’로 만들고, ‘시민과 야당들의 동반 승리’를 달성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제 박원순 시장이 시민들의 기대에 응답할 차례다. 그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서, 참여시정, 아름다운 시정, 희망을 제작하는 시정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