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책임·역사청산은 일본 성찰 거울”

일본사회운동 탐방(6)일본전후보상운동 대표적 역사사회학자 우쯔미 아이코 조희연·이영채l승인2011.11.0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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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못한 식민지 지배, 조사 못한 전쟁범죄 기술로 역사인식 변화
일본 시민운동 역사인식 문제가 일반사람들 언어로 기록되길 기대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끼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쯔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첫 순서는 지난 7월에 진행된 호사카 노부토 구청장과의 인터뷰이며,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프레시안과 함께 연재하는데, <시민사회신문>의 발행주기에 따라서, 2번의 인터뷰를 함께 싣는다. 편집자

조+이: 전후 처리 문제는 일본정부가 아시아 민중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후 60여년이 지났어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쯔미 : 패전직후,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과의 연대하에 일본 공산당의 전후초기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45년10월10일 오사카형무소에서 출소하는 일본공산당 간부들을 맞이한 것은 재일조선인들. 전후 제1차 일본공산당확대위원회가 동일 오사카의 재일본조선인연맹 사무실에서 열림. 조련은 식민지배 청산을 표명한 일본공산당을 지지함).

그러나 한국전쟁이후인 55년 재일조선인 운동이 총련으로의 노선 전환이 생기고, 또한 일본공산당도 민족운동에 대한 방침 전환을 표명하면서 식민지 청산의 과제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습니다(재일조선인운동은 한국전쟁이후 일본공산당의 지도노선에서 이탈하여 조선노동당의 직접 지도를 받는 총련으로 분리됨. 일본공산당은 중국과 소련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민족운동에 대한 노선의 수정을 통해 총련의 독립을 인정. 코민테른의 1국1당원칙이 공식적으로 소멸됨).

전후 일본의 좌파운동 속에서 아시아의 식민지지배 문제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 진 것은 이 시기 재일조선인 운동과 일본공산당 운동의 분열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사회가 침략전쟁의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나마 인식하게 된 것은 먼저 동경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포츠담선언10조 및46년1월 일본의 항복문서에 근거하여 46년4월26일 전범에 대한 재판을 개시하여, 48년11월12일 종료. 평화에 관한 죄. 통상의 전쟁범죄 및 인도적 죄의 명목으로 28명기소, 도죠히데키 수상 등 전쟁수행의 명령책임자인 A급전범 7명 사형, 16명 종신형 등을 받음)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패전 이후 동경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연합국은 전범들의 책임문제에 대해서 승전국에 관심이 있는 2차대전중의 전쟁범죄와 관련된 부분만 기소를 했으며, 아시아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전쟁범죄는 일체 묻지 않았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인데, 연합국인 네덜란드의 위안부 문제는 재판에서 다루어졌지만, 조선인 및 대만인의 위안부 문제는 추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연합군이 전쟁재판을 진행할 때에,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일본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일본의 아시아 식민지 지배문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인식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 측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구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독립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도 일본사회가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어느정도 인식을 하는 계기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조약의 성립 과정에는 한국전쟁의 발발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을 제시해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엄격한 배상을 받고자 했던 미국 및 연합국의 방침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지부지 됩니다. 냉전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연합군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게 되고, 배상제로, 무배상 정책이 일본에게 적용되게 됩니다. 게다가,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당시 중국과 한반도의 양 정부를 초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연합군측이나 미국에게는 미일안보조약이 더 중요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으로부터의 배상금을 포기하는 대신, 미일안보조약을 맺어 미군기지를 오키나와에 유지하는 비용으로 대체했던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발굴해 낸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

조+이: 82년에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을 냈습니다. 전쟁범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져왔고, 특히 역사의 망각을 현재적 기억 속으로 재현해 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연구만이 아니고 당사자들의 일본정부에 대한 사죄 및 보상운동에 40여년 이상 관여해 오셨구요. 1991년에는 다다요우코(26세에 요절한 인권변호사) 인권상도 수상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우쯔미 : 먼저 일제가 태평양전쟁 기간 실시했던 포로감시원 제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동남아를 침공한 일본은 42년 2월 싱가포르, 3월 자바를 점령하고 식민지 병력을 포함해 25만~30만명의 연합군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일본은 부족한 전투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42년 5월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함과 동시에 포로감시원을 모집했습니다.

반강제적으로 지원을 한 조선인 약3200여명은 부산의 노구치부대(野口勝三육군대좌 지휘한 부대. 부산에서 임시군속교육대를 운영,)에서 2개월간 엄격한 훈련을 받은 뒤 그해 8월 선박 편으로 3016명이 타이·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에 배치됐습니다.

종전 후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정착해 성공한 이가 있는 반면, 연합군 포로 학대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이 집행된 14명을 포함해 모두 12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이른바 조선인 BC급 전범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장기형을 받은 전범들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직전에 일본의 스가모 프리즌(도쿄재판의 수형자들을 감금. A급 전범 7명의 형집행이 이루어짐. 도쿄시내의 이케부쿠로 근처)로 이감돼 수감생활을 하다가 50년대 중반에 풀려난 뒤 ‘동진회’(재일조선인 및 한국인 BC급 전범, 유가족 약70여명이 상호부조 및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라는 뜻으로 동진회를 결성. 동료석방,일본정부의 사죄 및 보상을 촉구하기 위한 입법활동, 유골송환, 추모제 등을 해 옴. 회장 이학래씨)라는 상부상조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수감자 가운데 일부는 일본 정부의 냉대에 분격해 만기가 온 뒤에도 출소를 거부하며 항의하기도 했구요(52년 대일강화조약 발효이후 일본정부는 일본국적의 전범들을 석방하기 시작함. 조선인BC급전범은 일본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석방거부. 54년이후 관계자들의 석방이 이루어지나 생활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석방된 2명이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 생활보장을 요구하는 석방거부투쟁이 일어남).

일본은 BC급 전범기록들을 강제동원사례로 문제가 될까봐 관련 자료를 거의 소각해버렸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BC급 전범 중에서 그 죄명이 해명이 안된 경우가 많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BC급 전범을 재판했고, 그래서 일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네덜란드에도 기록이 있고요. 그런데 예를들어 일본측 BC급 전범을 재판한 25사단의 재판기록은 없습니다.

양칠성, 그리고 독립전쟁...

조희연·이영채 교수와 인터뷰하는 우쯔미 아이코.

조+이
: 조선인 비시(BC)급 전범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양칠성(1919-49. 42년에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배치. 종전후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사망)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 것 같습니다. 양칠성은 선생님에 의해서 한국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그 배경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시지요.

우쯔미 : 일본조선연구소를 그만두고 75-77년까지 저는 인도네시아 반둥에 있었습니다. 당시는 일본에서 전공투가 끝난 시기였지요. 학생운동 세대의 거의 대부분이 실업자가 된 상태였는데, 저는 일본어 교사 자격증을 따 가지고 반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만나게 된 역사적 인물이 바로 양칠성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했는데, 일본이 패전한 후, 식민지 종주국 네덜란드가 다시 영유권을 주장합니다. 인도네시아는 곧 새로운 독립전쟁을 시작하게 되고, 여기에는 일본인 병사들도 참여를 합니다.

우리들이 인도네시아에 있었을 때, 75년인데 일본인 병사를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으로 새롭게 추도하는 기념식이 벌어졌습니다. 유골을 파내서 무명묘지에서 영웅묘지로 바꾸는 이장의식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 1943년생, 인도네시아 전공자).

<새우와 일본인>으로 대표되는 여러 저작으로 글로벌리즘의 문제와 일본 및 선진국가의 소비에 의한 가해자의 문제를 파헤침. 시민이 직접 조사하여 발표하는 시민연구학의 기초를 형성. 현 와세다대학 교수)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무라이는 인도네시아가 전공이었고, 통역으로 이 행사에 참여를 했었던 것이지요.

그때 3명의 일본인이 영웅묘지로 이장되었는데, 2명은 일본의 유족에게 정식으로 연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에게는 일본 대사관이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다가 저희는 우연히 그가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화를 냈지요. 그럼에도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는가하고요.

2년간 인도네시아 있는 동안에 이들 3명의 일본인 및 조선인 병사들과 빨치산 투쟁을 함께 한 인도네시아 인들을 인터뷰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칠성 등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한 일본군내의 조선인 병사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행적을 더 구체적으로 조사해보니, 양칠성 만이 아니라, 그 부대 속에서만도 약 9명의 조선인들이 독립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 이름을 안 것은 양칠성 뿐이구요. 재일조선인의 <삼천리>라고 하는 잡지에 이것을 소개하는 글을 당시에 썼습니다. 그러던 중, 재일조선인중에서 양칠성이 조카라는 분이 나타났고, 이후 여동생도 한국의 전주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방문해서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보상운동, 여전히 중요

'김은 왜 재판을 받았는가' 표지.
조+이 : 양칠성을 한국-인도네시아의 우호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오늘날의 세계화 추세시대에 ‘국제주의적 연대’의 한 중요한 인물로 복원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전후보상운동에 대해 신자유주의 글로발 시대 아직도 과거에 집착한다는 비판을 하는 우익세력들이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 전후보상운동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쯔미 : 여전히 보상운동은 중요합니다. 전후에 일본 기업이 동남아시아 및 한국에도 진출을 하지요. 이러한 새로운 진출과 동시에 그 지역에서 문제가 촉발되면서 과거의 역사청산운동도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패전후 철수하고 난후, 역사는 묻혀졌지만, 일본기업이 재진출하면서 오히려 망각된채 남아있던 현지의 역사적 사실이 쟁점화되고 재추궁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전후보상이라고 하는 것은, 동경재판에서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양국간의 보상조약, 예를들어 한일조약에서도 심의되지도 않았던 내용들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80년대, 양심적인 시민들에 의해 가려져있던 보상문제가 대두되었고, 전쟁책임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저도 그때부터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고요. 예를들어 이상문 선생의 증언을 기록하면서 그 속에서 우리가 모르던 역사적 진실을 피해자들로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일본의 전쟁에 의해서 받은 피해에 대해서, 전후 일체의 보상도 배상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들이 협력을 해서, 일본 국가와 정부에 대해서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를 통해서 입법투쟁이 안되면 재판투쟁을 하게 되었구요.

91년에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여성운동, 사회운동, 역사문제에 관계된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후 전후 보상 재판이 89건 정도 진행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거의 모두가 패소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을 위한 원고가 만들어지고 증언들이 나오게 되었죠. 이것들이 일본에서 청산되지 못했던 식민지 지배, 조사하지 못했던 전쟁범죄들의 구체적인 기록들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경제적 지배 확대라는 문제가 있지만, 아시아 교류협력이 늘어나고 밀접한 관계가 되면 일본 시민운동의 역사인식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일반사람들의 언어로 기록되고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놓으면 일본의 다음 세대들이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조+이 : 일본에서 전쟁책임, 식민지 지배 및 보상 등 과거청산운동을 하는 분은 자기 나라의 ‘국익에 반하는 운동’을 해 나간다는 점에서 대단하신 분으로 보입니다. 과거청산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국가주의일 것 입니다. 가해자의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성찰하기가 쉬운데, 오히려 한국처럼 피해자로서 식민지의 저항적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스스로 성찰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쯔미 : 한국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강렬하다는 것을 우리들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와 국기가 상징하는 의미는 일본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에서 국기와 국가는 항일과 반일의 상징이었지요. 저항적인 의미로서의 국가와 국기는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분단 속에서 바라보는 국기와 국가의 의미는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한국기업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많이 진출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수준으로 보면 일본과 한국기업은 동일하게 인도네시아에서 착취기업에 속합니다. 경제적 침략의 측면에서 보면 인도네시아의 한국기업의 국가와 국기는 경제적 착취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지요. 태극기의 의미를 절대화하지 말고 상대화하여 다시 사회운동 속에서 재해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일장기에 대한 반대는 말 그대로 시민운동의 저항의 첫걸음입니다(99년8월13일 일본정부는 국기 및 국가에 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함. 기미가요와 히노마루가 공립학교의 입학식 및 졸업식에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이를 반대하는 교원 및 학부모들의 항의행동이 이어짐.

불기립 교원에 대한 도쿄도 교육위원회의 처벌 및 부당노동행위가 이어지고 있음. 교장의 기립요구에 불기립으로 응한 교원들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근거로 헌법위반을 제소하였으나 2007년 최고재판소는 교사들의 패소를 결정. 헌법합치를 인정하는 부당판결을 함).

우익은 일장기와 기미가요를 강하게 주장하지요. 글로벌리즘과 민족주의는 역설적이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을 수 도 있습니다. 글로벌리즘이 강화될수록 민족주의가 오히려 강화되는 역설적 현상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한국의 강렬한 민족주의, 태극기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어야 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의 비극은 국가나 국기에 그러한 저항이 현재에 와서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인BC급 전범’ 연구자 우쯔미 아이코는?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나 미국의 점령기를 보고 자란 그녀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입학, 자이니치(재일동포) 등 소수자 문제를 학문의 테마로 삼았다. 60년대 중반 일본 사회운동진영이 처음으로 설립한 [조선문제연구소]에서 가지무라히데키, 사토가츠미 등 조선연구 1세대들과 함께 연구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유학을 하던 중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희생자중에 BC급 조선인 전범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접하게 되면서 이 문제를 40여년에 걸쳐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다타요우코 반권력 인권상을 수상하였고, 일본 사회운동의 아시아연대의 창구역할을 해 온 시민단체 아시아태평양자료센터(PARC) 대표, 일본평화학회회장을 역임하였다.

2005년부터 한국정부에 의한 일제강점기강제동원진상규명회의 활동을 지원하는 일본측 네트워크의 공동대표, 유골반환 공동대표 등을 겸임하고 있다. 게이센 여자대학교를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와세다대학교 객원교수로 지속적인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후보상으로 생각하는 일본과 아시아](김경남역,논형출판), 조선인BC급 전범의 기록, {김은 왜 재판을 받았는가}(『キムはなぜ裁かれたのか』,朝日新聞出版) 등이 있다.

A급과 BC급 재판

[A급 전범]은 1946-48년, 연합국에 의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동경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죄]를 물어 전쟁의 결정 및 수행을 직접 담당한 전쟁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재판은 연합국이 공동으로 주관하였고, 도죠히데키(東?英機, 전시내각의 수상)등 28명이 기소되어, 도중병사 및 면책 된 3명을 뺀 25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고, 그중에서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BC급 전범]은, 1945년12월에 연합군총사령부가 정한 재판규정으로 A급이회의 [통상의 전쟁범죄]로 기소된 사람들로 사실상 B와C의 구별은 사실상 없다. 1945-51년, 요코하마와 중국, 동남아시아에 각 국 등 약49개소에서 7개국이 독자적으로 법령을 만들어서 재판을 행하였다.

현지의 군사령관에서부터 하사관, 일반병사, 통역 및 포로감시원들인 군속에 이르기까지 약 5700명이 유죄를 받았고, 그중에서 984명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50인이 감형되어 실제사형자는 934명.종신현 475명. 유기형2944명. 그중에서 조선인은 148명(포로감시원은 129명)이 유죄가 되었고, 23명(동14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대만인은 173명이 유죄가 되고, 26명이 사형을 받았다. 상관의 명령에 따를 뿐인 하급병사 및 군속들이 그 책임을 받아서, 처형되었다.1946년중반까지 일본에서의 변호사파견도 인정받지 못했고,통역도 부족한 상태의 재판이었다.

연합군은 태면철도 건설 등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의 학대 및 사망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였고, 전후 전쟁재판은 전쟁을 수행한 최고지도부와 포로를 직접적으로 학대한 말단 관리의 죄를 묻는 형태를 취하였다. 일본인 및 조선인 포로관리원 중에서는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한 구조상의 문제를 안은 채 사형을 받은 이들이 많았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 『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조희연·이영채 교수

조희연·이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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