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 고구려 웅혼한 기상 다시 보다

강상헌l승인2011.11.0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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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 논란속 역사왜곡 日꼼수 씻을 원본 탁본 일반에 처음 공개
고구려 건국 신화와 초기 왕들 업적 기술돼 역사 연구에 큰 도움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마련한 우리 역사의 문자(文字)와 관련한 큰 전시행사 ‘문자, 그 이후’전(2011년 10월 5일~11월 27일)에서 특별주제로 공개된 광개토대왕비 탁본(拓本) 원본과 관련 자료들이 관람객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광개토대왕비 원본 탁본 일반 공개

광개토대왕비 1, 2면과 3, 4면 탁본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통구(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인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워낙 큰데다 오래 비바람에 노출된 터라 자연적인 풍화(風化)나 마모(磨耗)에 의한 손상도 있었다.

청나라 말기 고증학(考證學)의 발달로 이 내용을 떠낸 탁본이 인기를 끌면서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 표면에 석회를 바르는 등의 훼손(毁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회로 변형된 것을 석회탁본이라고 하여 원본과 구분한다. 일본이 자기네 역사를 부풀리기 위해 비문 일부를 고친 꼼수도 한때 논란거리가 됐다.

1면의 하늘 천(天)과 밟을 이(履)자가 석회탁본에 인할 인(因)과 누를 황(黃)자로 변했다.
일본은 고의적으로 훼손한 이 비문을 토대로 고대에 자신들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說)을 지어냈다.

날조(捏造)로 판명되고 있어 이제는 실소(失笑)를 자아내는 역사의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많은 이들에게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 비석의 현재 위치는 중국 땅이다. 우리 학자 등 전문가들이 정확한 고증(考證)을 위해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망가진 채 떠내 유통되고 있는 여러 탁본 중 바르고 그른 것을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이유다. 이번에 일반에 공개된 원본은 그래서 더 의미롭다.

원본 탁본 1면 윗부분. 상중하 세부분 중 상(上) 부분이다.
또 이 비석을 보전하기 위해 1892년 중국이 현재의 비각(碑閣)을 짓기 전의 원래의 모습과 과거 이 비석을 탁본하는 모습의 사진도 선보여 광개토대왕비와 관련한 여러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큐레이터 이용현 씨는 “학술적인 관심에도 상당부분 부응(副應)하는 전시였지만, 광개토대왕과 연관한 민족적인 긍지를 새롭게 하는 계기로 이 전시를 기꺼워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또 최근 방송 등 대중매체들이 광개토대왕을 많이 조명한 까닭에 더 많은 관심을 모은 것 같다고 그는 덧붙였다.


광개토대왕비는 무엇인가

비각이 세워지기 전 광개토대왕비의 모습.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 동쪽 언덕이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39m, 가로 2m, 세로 1.48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22년 통치하며 국토를 크게 늘리는 등으로 역사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서기 374~412년)이 죽은 뒤 그 아들 장수왕이 부왕(父王)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세웠다.

비석을 받치는 받침돌과 비문(碑文)이 새겨진 몸통으로 이뤄졌다. 약간 손질한 자연석 4면에 문자 1802자를 새겼다. 마모와 훼손 때문에 글자 수에 관해 다른 주장도 있다.

고구려의 시조(始祖)인 주몽(추모 鄒牟)으로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의 왕의 세계(世系) 즉 계보(系譜)를 적고 영토 확장을 중심으로 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했다.
뒷부분에는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한 고구려왕들의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수묘인연호 守墓人煙戶)에 관한 규정 등을 적었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비롯한 고구려 초기 왕들
중국이 세운 비각의 내부에 들게 된 광개토대왕비.
의 업적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기술돼 역사의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됐다. 또 뒷부분의 묘지기 규정은 당시 왕의 장례와 관련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일러주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옛날 우리 시조 추모대왕께서 처음 이 나라를 세우시니 ...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태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태왕의 은혜는 하늘까지 가득하고 그 위엄과 힘이 온 세상에 떨쳤다.

태왕께서는 옳지 못한 적들을 무찔러 없애시니 나라와 백성은 부유하고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국립중앙박물관 도록 인용)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의 사후(死後) 정식 이름 즉 시호(諡號)이다. ‘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나라를 평안하게 한 다음 위대한 국강상(영토)에 묻힌 대왕’이라는 뜻이다.

왕으로 즉위하기 전 그의 이름은 담덕(談德)이었다.

압록강 북쪽에 큰 비석이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몇몇 문헌(文獻)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되고 나서 광개토대왕비가 비로소 발견되었다.

일본 관련 내용의 논란과 실상

비문에는 ‘왜가 신묘(辛卯)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를 근거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소위 ‘신묘년조 해석’이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명분을 살리기 위해 다소 과장되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어를 바꿔 번역한 것이 엉뚱한 해석을 부른 빌미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왕의 추모 비석임을 생각하면 당연히 비문 문장의 주어는 고구려여야 한다. 또 일제 강점기 일본군 정보부대가 석회를 발라 내용을 조작했다는 설도 있다.

인기 높은 광개토대왕비 탁본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이 비석의 탁본작업 또한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청나라 말기에 새로 주목을 받았다. 역사적 가치와 엄청난 크기, 비문의 내용과 구성 등에서 이 비의 탁본에 쏟아진 관심은 당연했다. 탁본의 가격도 비쌌다. 탁본을 뜨는 전문 탁공(拓工)들은 글자 획을 뚜렷하게 하거나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 표면에 석회를 발랐다.

원래 글자가 다른 글자처럼 보이게 된 것이나, 획이 덜 보이는 글자에 손질을 하여 아예 다른 글자로 만든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짐작한다. 국내의 탁본 대부분은 석회탁본이다.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바른 것 이외에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는 등 손상된 것이다.


강상헌 논설주간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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