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민족신화 해체야말로 일본 소수자 인권운동 과제”

조희연-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 탐방(7)우에무라 히데키 일본 시민외교센터 대표 조희연·이영채l승인2011.12.07 15:24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오키나와민과 아이누인에게도 인민의 자기결정권 보장돼야
재일조선인·민족학교 차별은 역으로 북일관계를 더 악화시켜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끼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쯔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첫 순서는 지난 7월에 진행된 호사카 노부토 구청장과의 인터뷰이며,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프레시안과 함께 연재하는데, <시민사회신문>의 발행주기에 따라서, 2번의 인터뷰를 함께 싣는다. 편집자

조+이: 일본이 단일민족이 아니고 소수민족의 공동체라는 주장은 사회적으로 파장이 클 것 같습니다. 일본의 소수자 인권운동에 참여한 계기가 무엇인지요?

우에무라: 저는 75년에 대학에 입학했고, 79년에 졸업했습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민청학련 사건 및 긴급조치시대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한국에서는 억압적인 정치체제가 지속된 시기였지만, 일본에서는 전공투가 정리된 직후로 소위 60년대부터 시작된 정치의 계절이 끝난 시점입니다.

대학졸업 후 81년에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년에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을 일본에서 본 기억입니다. 조희연교수님과 동세대로 일본에서 사회 및 사회운동을 고민했던 세대라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일본의 남쪽 쿠슈지방 출신입니다. 동경 등 중심부도시에서는 당시에도 정치적 메세지를 전달하는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주변지역은 많이 달랐습니다. 사회운동을 바라보는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구요.

저희 가족의 배경을 말씀드리면 일본의 아시아 식민지의 하나였던 대만출신입니다. 대만에서 생활했던 일본인 가족이었고, 종전후 귀국한 가족이지요. 할머니가 동북지역 출신인데, 메이지 유신 전후 막부들의 내전에서 패배한 지역으로 이들은 메이지일본에서는 차별 등으로 생활이 어려웠지요.(일반적으로 일본인의 해외도항은 1868년 메이지유신이후 시작된다. 유신이후 일본은 근대화와 급속한 사회변화속에서 농촌부의 잉여노동이 발생했고, 국내외에 이민노동으로 이어진다.)

1868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이민을 시작으로 1908년에는 브라질 이민이 시작됐다. 농촌경제의 붕괴는 농촌을 기반으로 한 다이묘(사무라이)들의 생활기반을 파괴했고, 이후 해외이민을 솔선해서 선택했다.) 결국 이민의 형태로 대만으로 이주했던 것이지요.

반면 할아버지는 큐수지역의 빈농 출신이었습니다. 큐수는 대만과 거리상으로도 가까워서 역시 이주를 하셨고, 두 분이 대만에서 만나 결혼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대만을 병합(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만을 할양받은 후, 같은해 11월 대만정벌을 시작해 50년간 식민지정책을 실시했다. 초기 대만인들의 저항이 강했고 5년간 약 1만명 이상이 학살당했다.)한 후 대량의 일본인 이주정책을 실시하는 데 이시기에 두 분이 대만으로 이주하셨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사탕수수 공장의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일본사회의 구별로 보자면, 지방인 쿠슈 출신에 식민지 대만에서의 귀국자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저희 집이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돌아왔을 때, 옆집은 조선의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귀국한 집안이었고, 그 옆은 만주의 하얼빈에서 귀국한 집안이었습니다.(아시아태평양전쟁의 종전직후 해외에 거주한 일본인 약300만이 일본으로 귀환하여 전국의 새로운 개척지를 중심으로 이주시켰다. 3.11원전사태가 발생한 후쿠시마 등 동북지방에는 만주국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어릴 때부터 다양한 지역배경을 가진 소수자 집단 속에서 함께 생활한 셈이지요. 제가 살았던 공간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식민지 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랐구요.

대학을 가기위해 동경에 유학을 왔는데, 개인의 출신배경 때문인지 당시 중심지였던 동경의 운동에 대해서 처음부터 위화감이 있었고, 말하자면 소수자적 시각에서 도쿄와 일본사회를 보게 된 것이지요.


조+이: 출신과 성장배경의 영향으로 소수자의 시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주류사회운동속에서 인권의 개념을 형성하기는 어려웠다고 보이네요. 특히 평화운동과 인권운동은 그 개념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일본의 인권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요.

우에무라: 일본은 2차대전에서 패했지요. 패전 후 어떤 반성을 했는가가 중요한데, 일본사회는 누가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정확히 추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보면 이 문제는 더욱 명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한국의 광주민주화항쟁과 비교를 하면, 최종적인 발포명령자와 책임자가 누구인 가에 대해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밝히지 못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은 국민들은 다 알고 있지만요.

일본은 광주의 진상규명 정도의 수준까지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단지 모호하게 뭉뚱그려서, 전쟁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되고 나쁘다고만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책임에 대한 애매한 처리는 우익들의 부활을 가져왔으며, 이들은 동경재판을 승전국에 의한 일방적 재판이라는 식으로 이를 부정했지만 자신들의 책임은 회피하였습니다.

이런 발상의 나라에서 인권문제를 제기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인권문제의 해결이란 누구에 의한 차별인가를 규정하고, 차별을 만든 구조와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동경재판이후 일본사회의 지배층부터 책임의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스스로 인권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사회운동 또한 평화운동은 매우 활발했지만, 인권의 시점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었죠. 결국 각 사안별로 개별적인 운동으로 제기하고 싸워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인권운동의 전환기는 80-90년대입니다. 이 시기 일본은 난민 조약을 비준했고(1982년),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향상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1980년대 재일코리언을 중심으로 외국인등록증의 지문날인철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지문날인은 1993년에 철폐됐다. 이 운동을 계기로 재일코리언들의 법적지위향상문제가 활발히 거론된다) 또한 여성차별 철폐조약을 비준하고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의 제정(1985년), 아동들의 권리조약도 비준(94년)되었습니다. 아이누 문제도 사회적으로 대두되었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인 운동만 해서는 각 사회의 인권개선은 어렵습니다. 국제적 기준을 적용하자고 해도 일본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일본정부도 국제기준을 준수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그렇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이런 현실은 거의 알지 못하고요. 결국 점점 치열한 경쟁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소수자는 사회내부의 최대의 희생자가 되어가는 구조가 정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소수자인권운동에서 본 일본의
‘단일종족신화’와 국가주의, 군국주의

국내인권기관.
조+이: ‘단일종족 신화(homogeneous-nation myth)’가 일본에서는 강력한 것 같습니다. 2005년 아소 타로(Aso Taro) 일본 외상이 일본은 단일종족의 민족국가(monoethnic nation-state)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고요.(아소타로 전 수상은 2005년 10월15일 후쿠시마현의 강연회에서 ‘하나의 문화, 하나의 문명,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의 나라는 일본국 빼고는 없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단일종족 신화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기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 국제결혼 여성에 대한 동화주의적 정책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흐름 및 군사주의의 강화는 한일양국에서 소수자 인권을 부단히 주변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에무라: 2차대전 패전직후, 일본사회는 식민지를 다 잃은 상태에서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책은 정당 구조내에 다양한 소수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폐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소련 공산당에서 조차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소수자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공산당에는 그러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1983년 이후가 되어서야, 아이누 출신은 처음으로 의회내에 후보자를 내게 되지요.

그런데 이러한 소수자의 공간 부재는 단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권 인식이 잘못된 것에서 연유합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소수자에 대한 탄압을 해 왔습니다. 특히 지배층에 대한 저항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던 것이지요.

결국 소수자의 인권문제라 함은 단일민족의 신화에 바탕을 둔 국민적 통합 정책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자유쟁취의 문제보다 차별철폐의 문제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라는 것이 주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단일민족.
조+이: 홋카이도 하면 영화 러브레터의 로케지였던 삿포로와 오타르의 눈으로 뒤덮인 하얀 평원을 연상하는 정도였습니다만, 아이누 족의 인권문제라는 것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요.

우에무라: 1960년대부터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 족을 중심으로 아이누협회가 만들어지고, 아이누 복권운동 및 아이누 문화복구운동을 시도하게 됩니다. 1987년에는 유엔에 의해 아이누 족이 원주민으로 인정받습니다. 아이누 권리운동이 전개되면서, 84년 아이누 족이 작성한 ‘아이누 신(新)법안’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누 지역이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디언 문제와 유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아이누 족의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 자연친화적 이미지가 일본의 대자본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특허권리를 요구하는 흐름도 있고요.

2008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류큐민족은 오키나와의 원주민이다 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저희는 아이누 족과 오키나와 민족의 문제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국제선언인 ‘더반선언’(2001년 남아프리카 Durban에서 인종주의, 인종차별, 외국인 배척 및 관련하는 불관용에 반대하는 세계회의가 열려 행동강령이 채택되었다)의 위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정부는 원주민 권리는 인정하면서도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였다고 주장만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1999년과 2006년에 아이누 생활실태조사가 이뤄졌던 적이 있습니다. 2006년 ‘현재의 생활이 어려운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이누 족들이 ‘만족한다’라는 긍정적인 응답이 많이 나왔다고 해서 대서특필되었던 적이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이누 족의 생활현실을 왜곡하는 잘못된 조사라는 논란이 되어서, 2010년 홋카이도 대학이 다시 조사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긴장이 계속 있지요. 저는 이러한 일본의 원주민 문제는 인종차별과 식민주의의 극복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민족자결권과 본토복귀 사이에서
분열한 오키나와의 주민들

일본평화공원

조+이
: 오키나와의 문제를 평화의 문제나 미군기지 반대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탈식민화의 문제로, 그리고 인민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권리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신선했습니다. 예컨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인민의 ‘자기 운명의 결정권’이 부정되었다고 한다면, 오키나와인들도 일본의 식민주의에 의해 그러한 권리가 부정되었다는 논리로 이해됩니다.

1879년 오키나와는 인민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고, 1972년 미국의 영토에서 일본의 영토로 반환되었을때도 ‘본토귀환에 의한 해방’이라는 식으로 또 한번의 반인민적 결정이 이뤄졌다고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 및 본토인들은 오키나와 문제와 조선의 식민지 문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주장이네요. 결국 오키나와는 미군과 일본국이라고 하는 외세에 의해 부당하게 식민지 통치되고 있다는 견해로 이어지는데 이런 견해는 사실 상당히 급진적인 것 같습니다. 결국 오키나와는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데요.

우에무라: 전반적인 논리는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더 짚어보지요. 저는 류쿠인은 국제법상으로도 독자적인 인민이라고 주장합니다. 고유의 문화를 지니고 있고요. 오키나와 인들의 정체성 속에도 혼돈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평화운동진영은 미군에 의한 점령기를 미국이라고 하는 이민족에 의한 지배의 문제로 보았고, 그래서 평화헌법을 가진 조국 일본에 복귀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주민들의 정체성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 주민들 속에서 오키나와는 본토의 일부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미군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 전략속에 정체성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72년에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었는데, 미일 안보조약을 이유로 미군기지는 오키나와에 그대로 둔 채 본토귀환이 이뤄집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주민은 결국 본토 일본인들에게 다시 배신당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본토는 여러 번 오키나와 현민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중국이 오키나와와의 ‘국내’통상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한 때 오키나와의 일부를 양도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본토상륙작전을 막기위해 오키나와는 45년 전쟁말기 섬 전체의 저항운동을 전개했지요.

그러나 결국 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은 독립국이 되었지만 오키나와는 미국의 영토로 양도되었습니다. 오키나와 내부에는 오랫동안 복귀 반대론, 자립론(또는 독립론), 오키나와 특별자치주론 등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오키나와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오키나와의 전통문화의 보존만을 이야기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일본정부는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습니다.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진영도 그렇게 급진적으로 나가지는 않지요. 그러나 복합적인 문제도 토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과적으로 타협점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조건으로 해서 타협하는 가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오키나와와 일본본토의 원리원칙을 상호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인식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락해방동맹 정기대회 장면.
조+이: 오키나와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시지요.

우에무라: 2차 대전이후 류쿠 독립을 위한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미군이 점령을 했지만,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인식이 있어서, 곧 독립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은 오키나와에 기지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죠. 초기에 미군기지의 유지의 부담을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의 약속으로 주민들을 분열시킵니다.

하지만, 미군정 하에서 미군기지에 의존하더라도 생활이 개선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는 주민들 속에서 본토 일본으로의 귀환이라는 입장이 다수를 형성하게 합니다. 왜곡된 구조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한 것이지요.

한편, 공산당 및 사회당 등의 평화운동과 연결된 진영 가운데는, 평화헌법이 적용되고 미일안보조약이 해체되면, 오키나와의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반면, 사회당-공산당과 연결되어도 만년야당 신세이므로 뭐 특별한 것을 획득할 수 없기에, 아예 주류보수정당과 연합해야 한다는 세력이 형성되고, 이들이 자민당 등 보수정당과의 연합을 시도하게 됩니다. 운동의 분열은 오키나와 주민의 분열을 가져왔고, 오키나와 문제를 더욱 왜곡시켜왔던 것입니다.

조+이: 그렇다면 오키나와 운동의 경우, 일본본토와 역사적으로 구별되는 집단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독립운동은 소멸했고 이제는 체제내적인 차별철폐운동으로 변화했다고 보아도 좋습니까. 이는 주민의 변화하는 의식 속에서, 소수종족이나 소수자 집단이 향후 어디까지 집단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가하는 문제로 그 성격이 바뀌었는지요.

우에무라: 그렇게 까지 깨끗하게 정리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키나와 독립운동은 별도로 하더라도 우선 오키나와로서의 권리가 지켜지기를 개인적으로 바랍니다. 오키나와는 일본에게는 남쪽의 창문이고 아시아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통로입니다. 동남아시아와도 제일 가까운 지역이지요.

하지만 오키나와 주민에게는 어느 쪽으로도 항공루트를 만들 권리가 부여되지 않습니다. 모두 일본본토가 결정하고 있습니다. 독립여부 와는 관계없이, 이런 형태로 주민의 집단적 권리가 부정되고 있는 현실부터 개선되어야 합니다.

조+이: 일본의 인권운동을 대표해서 유엔 인권위원회 같은 국제기구에 참여해서 일본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압니다. 주로 어떤 쟁점을 제기하고 있는지요.

우에무라: 주로 원주민 권리(Ainu, 오키나와인), 카스트(부락민Buraku)문제, 식민지배상(한국, 대만, 중국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희생자들에 대한 사죄 및 보상문제)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의 인권보고서와는 다른 보고서를 제출하고, 일본정부의 보고서에 대한 문제점을 시민운동의 입장에서 유엔 인권위에 제출하는 운동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소수자 인권운동의 현주소

조+이: 조선학교의 고교무상화 배제(민주당은 고교수업료의 완전 무상화를 실시하여 일본 국공립 및 외국인학교에 대해서도 무상화를 적용하지만 조선학교는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교육내용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유 등으로 무상화대상 학교에서 제외하여 노골적인 차별정책을 실시한다. 교육기관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도 북한의 일본인납치사건이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인 학교 학생들을 볼모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강하다)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우에무라: 인권은 정치와 분리되어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단위로 보더라도 그 경계선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등한 삶을 보장하다는 것이 인권의 기본원칙이지요. 출신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대우를 해야 하지요. 국제학교에서 배우는 아이들이나 조선인의 민족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이나 동일하게 적령기 아이들의 교육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정부가 왜 고교무상화에 대한 재정지원을 하지 않고 차별하는가.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강력히 항의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개개인의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에 있는 학생들이 그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재일조선인 및 민족학교에 대한 차별은 역으로 북일관계를 더 악화시킬 뿐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칸수상은 퇴진전날인 8월29일, 문부성에게 조선학교 무상화 대상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으나 현재까지 커다란 진전은 없다.)

인권문제로 다루는 것 자체가 역차별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재일코리언은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 사람들인데, 인권 문제의 대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입니다. 인권은 기본적으로 소수자를 지원하는 시점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지방 참정권의 인정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같은 사회의 일원이라는 일본인들의 인식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조선인 인권단체도 존재합니다만 소수자에 대한 국제적 기준을 일본사회의 재일코리언들에게 적용할 것인가는 일본의 엔지오단체들과 깊게 논의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우에무라 일본 시민외교센터 대표는?

1982년부터 일본의 시민외교센터(市民外交センタ?, Diplomatic Center for the Rights of Indigenous Peoples)의 창립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1956년 쿠마모토(熊本)에서 태어나서 케이오대학 및 와세대 대학에서 수학했다.

일본은 복수민족, 즉 홋카이도의 아이누 민족 및 류큐지역의 오키나와 민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시점을 견지하며 일본의 단일민족의 신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소수자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국내외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에는 일본 국제 인권NGO네트워크(the International Human Rights NGO Networks)를 만들어 인권문제의 사회적 여론화를 만들었다. 또한, 2005년부터 유엔개혁을 위한 일본NGO네트워크(the Japan NGO Network on UN Reform)의 중심적인 활동가로 일본정부 및 국제기구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화 및 국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케이센 여자대학교 국제사회학부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 『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조희연·이영채 교수

조희연·이영채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희연·이영채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