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폐쇄성, 좌파운동 분열시작”

조희연-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 탐방(8-상)무토 이치요우 사회운동가 조희연·이영채l승인2011.12.0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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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이후 신좌파운동 산증인···“원전문제 적극 반대운동 못한 책임 통감”
농민·학생 미군기지반대 공동투쟁은 역사에서 획기적인 하나의 상징적 사건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끼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쯔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첫 순서는 지난 7월에 진행된 호사카 노부토 구청장과의 인터뷰이며,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프레시안과 함께 연재하는데, <시민사회신문>의 발행주기에 따라서, 2번의 인터뷰를 함께 싣는다. 편집자

조+이: 한국전쟁 전후부터 시작하지요. 당시 일본 좌익정당운동, 특히 공산당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요. 소련공산당 및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무토: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당시 ‘누가 침략했는가’에 대한 큰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좌익의 일반적인 생각은 ‘미국이 도발을 해서 북한에 선제공격을 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일본사회당은 한국전쟁발발 2주후,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판단, 일본공산당은 소련의 입장 지지를 둘러싸고 분열). 당시 정보가 충분히 없었지요. 그리고 좌익은 그러한 입장과 분석하에 운동을 했습니다.

이 무렵 일본공산당이 심각한 분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소련의 스탈린의 정책이었습니다. 당시는 코민포럼이 결성된 시기였죠. 50년 1월에 소련의 프라우다지가 갑자기 일본공산당을 비판하게 됩니다. 미제국주의와 싸우지 않으면서 현재의 미군정하에서 혁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점에서 노사카 산조(1892-1993, 초대일본공산당의장, 코민테른일본대표, 중의원 및 참의원역임, 1931년에 소련입국, 40년 연안에서 중국공산당에 합류, 44년 일본인민해방연맹결성, 46년1월 소련경유로 일본귀국, 3만명의 환영대회. ‘사랑받는 공산당’ 노선으로 천황제인정, 미점령군은 해방군 인정 및 그 산하에서의 평화혁명노선을 주장. 50년 소련공산당은 노자카의 노선을 비판하자 이에 반박하는 소감파에 속해 미야모토겐지 등의 국제파와 대립.

92년 잡지의 기사에 의해 소련스파이로 판명. 일본공산당 명예의장에서 제명)의 입장은 잘못되었다. 노사카 산조는 소련에 체류하다가 종전후 일본에 온 사람입니다. 소련 공산당의 이런 비판이 일어날까, 이것을 지지할 것인가 아닌가로 일본공산당이 분열하게 됩니다. 어려운 난제였습니다.

1955년, 일본좌파운동 역사적 전환기


조+이: 55년 상황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 주시지요. 결국 일본공산당내에서 재일조선인들이 탈당해 조총련을 설립하는 해 이기도 합니다만.

무토: 1955년은 전환점이 된 해입니다. 전체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하지요. 지적한 대로 55년에 조총련이 생기게 됩니다. 일본공산당은 50년대에도 항상 올바른 투쟁을 했고 겉으로는 틀린 노선을 걷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무 것도 한 것은 없었지요.

그런데 명분 때문에 폭력혁명노선을 내걸었고 그래서 한국전쟁 휴전직후 열린 선거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때 6전대회가 열리게 됩니다. 당시 일반당원이 모르는 사이에 상층부는 파벌투쟁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 전국협의회를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유명한 제6전국협의회(6전협)라고 부르는데, 일본공산당은 이 대회에서 그동안의 혼란을 정리하게 됩니다. 먼저 폭력혁명 노선을 충실히 실행해서 열심히 투쟁을 했던 사람을 다 제명해버리게 됩니다.

지도부의 상황설명이나 자기비판도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당의 폭력혁명노선에 따라 열심히 싸웠던 사람에게 일본공산당이 처한 어려움을 다 뒤집어씌우는 식으로의 상황정리였습니다(일본공산당내의 다수의 조선인 활동가들이 비판을 받고 탈당함).

1955년은 일본 역사에서나 좌익정당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첫째, 일본공산당이 당내 분열을 넘어 통일을 하게 됩니다. 둘째로, 일본사회당도 좌우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좌파의 주도하에 통합하게 되지요. 세번째는, 지금까지 분열된 보수당과 자유당도 자유민주당으로 통합됩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은 춘투(春鬪)(매년2월 열리는 일본의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먼저 자동차, 전기, 철강 등 금속산업 및 제조업을 시작으로 단체교섭을 하고, 그 이후 철도 및 전력 등 비제조업 분야가 동참. 55년 5산별단체 공투회의, 55년에 8산별단체를 결성해서 전개)라는 것을 전개하게 됩니다.

8개의 산별노조가 공동으로 춘투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동일 노동-동일 임금을 요구하게 됩니다. 당시까지 노동운동진영의 통일된 임금인상요구투쟁은 없었습니다.

6전대회와 일본공산당에 대항하는
새로운 조직운동의 탄생

조+이
: 통상 일본 공산당의 관료주의적 경향, 친소적 맹목주의, 반제반미 일면노선 등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일본공산당의 활동 및 이에 대항하는 조직운동들에 대해 평가해 주신다면.

무토: 55년에 6전대회가 있었고. 저는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48년 결성당시는 일본공산당의 영향. 55년 일본공산당의 6전대회 이후 일본공산당 비판세력이 주류를 형성하며 전공투를 결성. 60년대와 70년대 안보투쟁을 주도함. 70년대 신좌파의 각파의 영향을 받아 내부폭력 및 연합적군파의 동료살해사건 등으로 급격히 퇴조. 2011년 현재 각 주요 잔존파들이 각 파의 전학련을 자칭 확인된 5개의 조직이 있음)조직에 들어가게 됩니다.

54년에 전학련 리더가 체포되었고, 저도 체포되었습니다. 3년3개월만에 감옥에서 나왔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일본공산당 조직 내에서 총점검운동이 있어서, 오히려 저는 제명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셈이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출옥 후에 신문을 받았지요.

그 후 공산당 지도부에서 ‘너는 청년운동을 하라’는 식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청년운동이라함은 당시 민청(일본민주청년동맹, 1923년의 일본공산청년동맹이 전신. 1960년 6전대회에서 현재의 규약과 조직을 유지, 신좌파계의 전공투세력과 대립, 70년대 약 20만명의 구성원을 이루었으나, 현재 약 2만정도로 추정)이었는데 권위있는 조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공산당은 혁명을 위해서 폭력투쟁을 하는 노선은 이제 안 된다는 생각이 주류였습니다. 그래서 문화운동적인 경향이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래가사를 바꿔서 부르는 소위 우타 고에(1960년대 중반 노래방을 중심으로 평화 및 노동운동의 노래를 합창으로 부르는 사회운동. 일본의 우다고에전국협의회에는 약 400개의 단체가 가맹하고 있음)와 같은 활동도 있었습니다.

코러스 써클을 만들어서 러시아 민요라던가, 일본의 이전 투쟁가들을 부르고 보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들은 청년운동과 결합되어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대중성의 운동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운동으로 분트(Bund, 전학련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일본공산당을 탈당해 58년에 신좌익조직. 공산주의자 동맹을 의미. 안보투쟁후 60년에 해체, 66년에 재건하였으나 70년에 해체이후 세분화됨. 1847년 런던에 망명한 독일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따옴)를 만드는 그룹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분트세력은 일본공산당에 대해서 비정치적인 활동만을 한다는 식의 비판을 하면서, 일본공산당 주류로부터 분리를 하게 됩니다. 일본공산당이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 명확한 정면돌파의 방침을 내지 못하는 대신에 문화활동에만 전념한다는 비판을 한 것이지요. 결국 이런 비판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공산당은 55년 6전대회에서 문화활동을 폄하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아무런 총괄도 없이 말이지요.

이렇게 6전대회에서 문화활동을 폄하하는 결정을 내리자, 하부에서 열심히 일하던 문화활동가들이 갑자기 실업자가 되어버립니다. 개인생활을 버리고, 모든 것을 조직에 다 바쳤는데, 아무런 총괄도 없이, 청산을 해 버린 것이지요. 정식으로 총괄해서 다시 하자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모두가 피해자 의식만을 갖게 됩니다. 규모는 작지만 중국에서의 문화혁명 이후의 분위기가 존재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조직의 결정에 열심히 따르던 사람들이 갖는 피해의식이지요. 결국 개인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와 이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일하던 청년조직이 없어지면서 저도 직업이 없어져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그때 국제통신사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노동조합의 기관지들의 교토통신 같은 조직이라고 할까요. 기관지들의 뉴스 보급처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인데, 청년운동을 접고 거기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전학련 학생운동과 일본공산당 전위운동의 대립

조+이: 일본공산당으로부터 분트세력이나 트로츠키파가 분리되는 것이 일본좌익운동의 가장 큰 분기점으로 보이네요. 당시 전학련그룹은 어떤 사상적 조류를 대변하고 있습니까.

무토: 58년 전학련 조직 속에서 이후 분트라고 불리는 세력이 형성됩니다. 기존에 이미 트로츠키 조직(52년경부터 일본내 트로츠기 연구그룹이 존재)도 있기는 했습니다. 당시는 일본공산당 내에서의 트로츠키 모임정도의 형태였죠.

기본적으로 일본공산당의 체질은 학생운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전위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이기에, 학생은 프티부르주아지로 규정되지요. 그들이 단일하게 움직인다해도 결국은 쁘띠부르주아지로 전락하는 것으로 일본공산당 내에서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전쟁전후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속에서서도 전학련에 대한 일본공산당의 주요인식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반대하는 학생운동 내의 비판적 흐름이 있었습니다. ‘학생층으로서의 연대가 가능하다, 학생 나름의 독자적인 혁명사상이 있다’는 인식과 행동이죠. 45년 8월 직후 미군정 점령 후 형성된 초기 전학련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요. 50년전 후 레드퍼지에 대한 학생운동의 저지운동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입니다.

6전대회 이후 전학련 그룹내 일본공산당 비판은 전면적으로 대두하게 됩니다. 다치가와의 수나가와 미군 기지(지금은 소화기념공원,55년부터 57년에 걸쳐서 도쿄북쪽의 수나가와지역에서 다치가와미군기지확대를 저지시킨 운동. 신좌파학생들의 영향력이 많았음) 반대투쟁이 하나의 상징적 사건인데요. 농민들과 학생들이 오랫동안 공동투쟁을 해서 마지막에는 결국 기지를 저지하게 됩니다. 일본의 미군기지반대투쟁의 역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투쟁이었지요.

하지만 일본공산당은 전학련이 운동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 대립이 있는 속에서, 학생들 일부는 일본공산당에 대해서 전략적?사상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계혁명과 혁명적 폭력에 대해서 공산당과 전학력 학생들 간에 이견이 심화된 것이지요.

당시 전학련은 세계혁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국주의 성격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했지요. 56년 당시의 일본공산당 강령초안은 51년 강령(일본의 해방과 민주적변혁을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것은 잘 못된 인식이었다)을 수정했습니다(일본의 현단계의 혁명은 민주주의혁명이고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2단계론 혁명).

즉 일본은 제국주의가 아니고, 절반만 종속된, 반(半)종속국가라는 규정을 했지요. 당시 공산당 내의 구조개혁파(소련공산당의 각 국의 내부간섭에 대해 반대하고 각 국의 독자적인 이론을 주장. 일본공산당이 소련공산당과 거리를 둔 시점에서는 오히려 소련공산당을 지지하는 노선을 보이기도 함. 폭력혁명을 취하지 않고 장기적인 사회변혁을 계획. 사회당 및 총평계열에도 영향력을 줌. 현재 신좌파로서는 프론티어 그룹 등이 계승하고 있음)들에게는 그람시의 영향이 컸습니다.

전전의 구조개혁파와 노농파의 사고를 이어온 것이었지요. 당시 일본 공산당은 ‘자본주의 모순을 타도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즉 일본은 후진자본주의 국가다. 봉건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존재한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전에 미국의 식민지로서의 종속성을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2단계 혁명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본주의 타도는 다음 단계의 혁명이라는 것이지요. 당시 타이 공산당도 그렇고 필리핀 공산당도 모두 2단계 혁명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학련 등 공산당 비판세력들 사이에서는, ‘제국주의를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면, 레닌의 제국주의 지표를 기준으로 할 때, 이것을 충족시키면 제국주의다.’ ‘이 기준의 몇가지 규정만 충족해도 제국주의이다’라는 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일본공산당과 반대파가 분열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 문제 설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구체적인 분석이 없었고, 이념공론적인 성격이 강했지요. 미일 관계는 대단히 복잡한 관계인데, 그것을 분석하지 않고 좌익적인 탁상공론으로 논쟁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종속되었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아니다’라는 규정, ‘고도로 발전했다고 해도 제국주의는 아니다’라는 규정보다도 제국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재검토했어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레닌주의의 교조주의적인 시각이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공산당의 사상적 폐쇄성과 60년대 반대파 제명사태

무토 이치요우와 대담하고 있는 이영채 교수와 조희연 교수.

조+이: 일본공산당의 성격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공산당은 당중앙의 공식적인 입장 이외에는 어떠한 이견도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이고 배제적인 입장을 줄곧 취해왔던 것 같습니다.

무토: 당중앙의 결정이외의 급진적 또는 개량적 입장들은 다 이단으로 취급되어 버리는 일보공산당의 폐쇄성이 좌파운동의 약화와 분열의 시작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산당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견이나 분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운동 자체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공산당은 민주집중제의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명 등 가혹한 처벌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공산당 중앙의 입장도 약해졌지만, 가혹하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줄곧 견지해 왔습니다.

예를들어 천황제를 봉건제로 규정하는 것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에 대한 공론적 토론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획일적인 당 방침만이 강요될 뿐입니다. 또한 공산당은 자기 영향력 하에 있는 댜른 대중 및 단체들과 연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영향력밖의 다른 대중단체와 연합해서 하는 운동은 체질상 맞지 않습니다.

수나가와의 미군기지반대운동은 여러 대중단체들의 연합에 의해 성공했지만, 공산당은 이들 단체들과 연합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공산당이 과거보다는 개방화 되었다는 인상도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다른 대중단체와의 연대는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조+이: 당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거 제명했던 61년 제명파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무토: 61년은 제명파동의 해입니다. 7월은 제8차전체대회가 열리는데, 당시는 56년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스탈린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왔던 일본공산당의 방침이 문제로 대두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당 중앙이 강령수정안을 내놓았는데, 50년대부터의 스탈린주의적 요소에 대한 몇가지 쟁점에 대해서 상당히 미봉적인 강령이었습니다(일본은 미국의 반점령된 종속국이고, 직접 사회주의혁명을 지향하지 않고, 반제반독점의 인민의 민주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단계적 혁명을 실행). 이 수정강령에 반대했던 중앙위원 10명이 모두 제명됩니다.

당시 민주집중제 적용 등의 문제에 대한 토론도 전면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또한 당시는 중소분쟁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당 중앙의 당 권력에 의한 내부 사상통제도 강화되었죠. 예를들어 일본공산당내의 친중파들은 중국의 모택동사상으로 통일하자는 논리도 제기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중에 64년 다시 제명파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장 큰 쟁점은 부분 핵실험 반대를 둘러싼 논쟁이었습니다. 시가요시오(志賀義雄,1901-1989, 일본공산당중앙위원)라는 유명한 중앙위원을 비롯해서, 부분핵실험에 찬성했던 사람들이 제명당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친중파였는데, 중국공산당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중소분쟁의 시기였기에, 중국파들은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서,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답습했습니다.

또한 일본공산당으로 하여금 중국공산당 지지를 표방시켜서, 소련공산당과 대립시키고자 했습니다. 예를들어 일본공산당 산하의 평화위원회에 요시카와 유이치(吉川勇一, 일본공산당출신으로 65년 원수협 세계대회의 방침에 반대하여 제명당함. 이후 시민운동가로 변신, 베트남반전평화운동의 사무국장역임)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중국파의 이런 논리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결국 친중그룹들이 제명당했던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PPSG 이끄는 무토 이치요우는?

무토 이치요우(武藤 一羊)는 일본사회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50년대 이후 신좌파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동경대학 일본공산당 학생조직의 세포활동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일본공산당에서 제명된 이후 베트남반전운동을 이끌며, 70년대에는 일본의 국제연대운동의 상징적 기구인 ‘아시아태평양 자료센터(PARC)’를 설립해 대표를 역임해 왔다.

냉전붕괴직전의 80년대 말에는 아시아민중대회를 개최했고, 그 성과로 90년대에는 ‘민중플랜21(PP21. People’s Plan 21)’이라는 사회적 대안을 만드는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현재 PP21의 후속단체인 PPSG(People’s Plan Studies Group) 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무토 이치요우는 일본의 아시아 민중연대와 진보적 사회운동을 개척해 온 활동가이다.

최근에는 3.11후쿠시마 원전사태이후 전후 일본의 좌파운동이 핵 및 원전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해 오지 못한 책임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전후 일본의 주요 변화와 무토이치요우

무토 이치요우의 인터뷰는 개인사이면서 또한 전후 일본사회운동사의 한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피해이후,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임으로써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이후 미국과 연합군은 GHQ를 설치하며 52년까지 일본을 점령통치했다.

한편 일본당국은 46년에 이른바 평화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메이지이신이후 신격화되었던 천황을 상징천황으로 강등시키고, 일체의 무력행사를 포기한 제9조를 삽입해 전후 일본의 평화구조를 지탱해 온 기본 틀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냉전의 격화 및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이후, 일본내 공산화를 우려해 일본의 민주화 조치를 전면 중단하게 된다. 또한,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수행을 하기 위한 배후기지로서 일본을 활용하게 된다. 미국의 신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일본은 1951년 미국 및 연합국과의 대일강화조약(샌프라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해 독립국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호황을 통해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한 일본에서는 1955년 선거에서 사회당의 약진과 이에 대항한 보수당과 자유당의 보수대통합을 통해 만들어진 자민당이 등장하며, 이른바 55년 좌우대립체제가 탄생한다. 이 55년체제는 93년 신당을 표방한 호소카와 내각의 등장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의 확대 및 냉전시기 동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되어 감에 따라, 미국은 일본을 비군사국가가 아닌 미국의 후방을 지원하는 군사동맹국가로 역할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평화헌법에 발목이 잡혀있는 일본은 60년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을 요구하는 키시내각에 대하여 수많은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세력들이 강력히 저항했고 소위 60년대 ‘안보투쟁’을 분출시켰다.

65년 한일회담반대투쟁, 68년 베트남전쟁반대를 위한 시민들의 저항운동, 70년 신안보투쟁 등을 통해 일본의 사회운동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60년대 말부터 70년대초 일본자본주의의 주류문화 및 사회의 권위주의청산을 내건 소위 전공투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일본의 사회운동은 일본공산당과 사회당으로부터 독립해 신좌파운동이라는 다양한 사회분야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70년대 신안보투쟁의 실패(미일안보조약의 자동연장), 신좌파운동의 극좌주의 및 고립주의의 영향으로 사회운동 전체는 침체국면을 맞이한다. 70년대 중반이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전국적 투쟁의 시대를 종료하고 다양한 풀뿌리 운동 또는 지역운동으로 분산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본의 좌파정치조직으로는 일본공산당과 일본사회당이 대표적인 제도권 정당이고, 정당외에 일본공산당 반대파로는 혁명적 공산주의그룹으로 불리는 분트와 트로츠키파 등 다양한 분파 혹은 섹트가 존재했다.

먼저 분트그룹은 다시 혁명적 폭력투쟁노선을 채택했던 극좌계열인 적군파 깃발파,반깃발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트로츠키파는 제4인터내셔널파와 일본 독자파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일본 독자파는 다시 대중운동과 현장투쟁을 중시하는 중핵파(츄가쿠파)와 혁명적 공산주의동맹(가쿠마루파)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사회당 계열로는 혁명적 폭력투쟁노선을 표방한 해방파가 존재한다.

60년대 일본 사회운동의 분출을 가져왔던 안보투쟁은 전학련 학생조직중 주로 분트그룹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성을 기반으로 한 일본공산당과 대립하면서, 전학련 학생간부들의 대량 제명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무토 이치요우는 이러한 전후 일본사회운동의 핵심적 부분에서 좌파운동을 이끌어 온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조직가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 『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조희연·이영채 교수

조희연·이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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