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늙은 지렁이가 가슴팍 환대를 한껏 부풀려 벌름댔다.
회의 소집신호였다. 밭을 옮길지 말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해마다 배추밭 농부가 뿌리는 제초제로 인해 지렁이들이 불구가 되거나 죽어나갔다.
늙은 지렁이는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한시바삐 다른 밭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밭을 제 몸처럼 아끼는 농부를 찾아야만 합니다.”
늙은 지렁이가 의향을 물었으나 지렁이들은 몸을 도르르 만 채 시무룩해 있었다.

“밭을 바꾼다고 사는 게 달라질까요? 왼편 마늘밭, 고추밭 농부도 이 배추밭 농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기간에 큰 수확을 낼 생각만 하지 우리 같은 밭 속 생명들은 안중에도 없어요.”
냉소적이 된 지렁이들은 그 농부가 그 농부라고 탄식했다.

“움직이면 어린 것들 고생시킬 뿐입니다. 옮겨갈 생각 말고 이대로 배추밭에 눌러 살지요.”
많은 지렁이들이 동조했다. 어린 지렁이들은 차라리 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훌쩍이며 흙벽에 머리를 찧어댔다.

“한 농부가 있긴 합니다. 저 위쪽 감자밭 농부입니다.”
한 젊은 지렁이가 그 농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다. 감자밭 농부는 약 치면 편하고 수확도 훨씬 나은데 뭐 하러 김매며 뼈골 빼느냐는 다른 농부들의 빈정거림에 밭을 해치지 않을 방법으로 농사짓는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허리 비틀린 지렁이는 한 일화를 꺼냈다.
“장대비 내리던 날, 길가로 몰려나갔다가 볕이 쏟아져 화상을 입고 되돌아오던 중이었어요. 우린 이 배추밭 농부의 장화에 짓밟혔어요. 배추밭 농부는 허리 으스러진 우리를 발끝으로 톡 차버리고 갔답니다. 하지만, 감자밭 농부는 흙 한 삽 떠낸 밭고랑 속에 우리들을 두 손으로 옮겨주었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지렁이들이 주름을 펴고 감자밭으로 가고 싶은 솔깃한 얼굴이었다.
“오르는 길이 험할 것이나 우리가 살길은 감자밭으로 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늙은 지렁이가 결론을 내렸다. 곧 한 무리의 지렁이들은 흙속을 뚫고 감자밭을 향해 잔물결처럼 나아갔다.

그러나 또 한 무리의 지렁이들은 옮겨봐야 신세가 바뀌지 않는다며 배추밭의 제 자리로 꼼지락꼼지락 기어들어갔다.

한정선 작가

한정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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