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들의 유토피아

한정선의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한정선l승인2012.07.31 13:06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참주원숭이의 생일이었다. 섬 안의 원숭이들이 참주의 생일잔치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하지만 긴꼬리원숭이는 자신의 젊은 추종자들과 함께 해안가에서 다른 섬으로 이주할 거대한 뗏목을 만드느라 오지 않았다.

잔치의 취흥이 무르익어갈 즈음, 참주가 냉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섬을 지키기 위한 심각한 논의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냥 참고 넘어갈 참주가 아니었다. 일시에 취기 오른 멍한 눈동자들이 참주에게 쏠렸다.

“긴꼬리원숭이가 이 섬의 소중한 보호수를 마구 도벌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뗏목을 구실로 젊은 무리를 규합해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섬을 분란의 도가니로 만드는 그 자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까요?”

참주의 번쩍이는 눈이 원숭이무리를 훑어보았다.
갑자기 원숭이들이 두드러기가 돋아 괴로운 것처럼 배를 긁어대며 몸을 옴죽댔다.
참주의 뜻을 거부하는 원숭이는 ‘빨간 눈을 뜬 자’로 찍히기 때문이었다.

참주원숭이의 말은 법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 지진의 징후를 예견한 긴꼬리원숭이가 다른 섬으로의 이주를 요청했으나 묵살했다.
참주는 허무맹랑한 말로 무리를 선동하는 자, 허락이 없이 섬 안의 보호수를 베는 자는 추방을 하겠다’고 원숭이무리들에게 알렸다.

“법을 멋대로 어기는 자들은 마땅히 추방입니다. 본보기를 보이지 않으면 우리 섬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참주와 붙어 다니는 시중원숭이들의 목소리였다.
다른 원숭이들은 부어오른 입을 하고 캑캑 재채기를 하거나 불만스런 눈알을 끄먹거렸다.

“긴꼬리원숭이님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은 이 섬의 법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라고 하셨고,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자유라고 하셨습니다. 종족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 분의 추방은 부당합니다.”

취기로 머리가 돈 것인지, 곪았던 무언가 터진 것인지 한 젊은 원숭이가 겁 없이 소리쳤다.
그 말에 힘입은 원숭이들이 우 하고 일어서서 주먹을 치켜들고 부당하다는 구호를 연달아 외쳤다. 무리들의 거센 저항에 놀란 참주의 얼굴이 핼쑥했다.

“민주적으로 나뭇잎 비밀투표를 하기로 합시다. 나뭇잎 수에 따라 추방’을 결정하는 겁니다.”

돌연히 참주가 선선한 표정을 하고 제안했다.
시중원숭이들이 그게 좋겠다고 맞장구쳤다.
원숭이무리들도 결의에 찬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더니 투표를 찬성했다.

동굴 안에 붉은 바구니와 검은 바구니 두 개가 놓였다.
붉은 바구니는 ‘빨간 눈을 뜨는 자’가 되는 것이었고 검은 바구니는 ‘추방’이었다.
원숭이들이 차례대로 동굴 속 바구니에 구멍을 뚫은 나무 잎을 놓고 나왔다.

투표 후, 검은 바구니는 나뭇잎이 고작 몇 잎, 붉은 바구니는 나뭇잎이 탑이었다.
원숭이들은 괴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어다니고 서로 껴안고 손뼉치고 난리였다.
원숭이무리들이 해안가로 우르르 몰려갔다.

다섯 명의 젊은 원숭이들과 함께 야자수 잎으로 밧줄을 꼬고 있던 긴꼬리원숭이가 일어섰다.
원숭이무리들이 긴꼬리원숭이를 빙 둘러 에워쌌다.

한 원숭이가 긴꼬리원숭이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이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긴꼬리원숭이님과 함께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들의 참주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한정선 작가

한정선  @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정선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