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간다.

이른 새벽 저 멀리 태양이 솟아오르고 깊고 짙은 푸른바다를 가르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거대한 배가 미끄러지듯 간다.

고삐 잡은 주인의 신호에 순종하는 말처럼 거대한 쇳덩어리가 망망한 대해를 가르며 저 멀리 아득한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비장한 각오로 나아간다.

무거운 컨테이너 박스가 질서 있게 쌓여서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바쁜 걸음을 한다.

▲ 한진해운 소속 컨테이너선

육상과 육상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막대한 임무를 비가 오나 바람 부나 안개를 가르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숭고한 사명에 부름 받은 것처럼 임무를 위해 달려간다.

이런 배가 몇 백 개 아니 몇 천 개가 바닷길을 오가며 육지 사람들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학교 졸업 이후 한 해도 쉼 없이 십 수 년을 배와 함께 바다와 함께 보내는 남편 배가 가르는 하얀 포말만큼이나 내 가슴에도 말 할 수 없는 포말이 인다.

여태 젊음을 바다에 보내고 이젠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되어가면서 진력이 날대로 날 만한데 아내한테 자식한테 한 번도 역정을 내거나 판을 엎을 큰소리 한 번 안 내고 안으로만 삼키는 심정을 헤아려보는 지금 이 시간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정년은 지났지만 그동안 보낸 세월만큼이나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배 생활이 편안한 집처럼 아무런 고뇌나 갈등이 없는 듯이 순응하는 남편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휴가 때 한 번씩 그리고 간혹 다른 사람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다고 속내를 드러낼 때는 짐짓 못 들은 채 넘어가고 화제를 바꾸곤 하면서 이제까지 온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가정의 평온을 위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평생 어깨를 짓눌러왔지만 표현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내는 바다의 심연 같은 깊은 속을 짧은 소견의 철없는 아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어찌할 바 몰라 냉장고의 차가운 캔커피 하나를 들이켠다.

먼 바다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바다의 용사들을 진두지휘하는 회사의 오너들과 오늘도 무사항해를 염원하는 회사직원들과 뱃사람의 가족들이 같은 마음 같은 목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한 깊은 애정을 느낀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회사의 번영과 나아가 이 나라 국가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것에 헌신한 시간들이 언젠가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소망해본다.

결코 짧지만은 않은 긴 동승 기간 동안 나한테 몇 가지 약속을 해본다.

절대 남편한테 갑갑하거나 힘들다고 투정부리지 않기, 긴 선상생활 중 결혼생활을 꾸려나오면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부부만의 추억을 만들어보기, 그냥 옆에만 있어도 마음 푸근하고 행복한 남편으로 만들어 주기, 같은 아픔과 고통을 나누는 평생의 반려자로서의 위로자가 되어 줄 것, 40여 일간의 긴 항해를 마치고 다시 부산에서 헤어질 때는 집에 가기 싫다고 응석도 부려야지.

곧 중국 청도항에 들어간다고 두툼한 겨울파카를 겹쳐 입고 중무장하고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배웅하면서 멀리 아련히 보이는 거대한 중국의 모습을 맨 먼저 드러내는 청도항이라는 곳을 응시해본다.

김명숙 해영선박 유성열 선장 부인

양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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