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이후 도시 산업화는 농촌의 붕괴를 예고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곧 농촌해체라는 고향상실의 큰 아픔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이 시기의 많은 시인들 역시 농촌의 공동체적 삶이 해체된 피폐한 현실과 아픔을 고향의식을 통해 보여주었다. 당시의 시편들은 1930년대 시인들이 보여주었던 고향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개인의 시적 경향은 다르지만 고향상실이라는 큰 전제 속에서 못나고 보잘것없는 사람살이의 정황이나 붕괴해 가는 농촌을 구체화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향의식으로 상징되는 민족적 삶의 원형이 훼손된 데 따른 안타까움의 시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고향은 한 개인이 태어나 자라고 늙어서 죽어 묻히는, 스스로가 자신이 주인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한 자아의식에서 출발한다. 혈연적 동질성이나 문화적 동질성을 전제로 한 하나의 통합된 정신세계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고향의식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본래적인 생의 의미를 찾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을 노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상실된 고향에 대한 시 의식의 발로이다.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10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 고향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황량한 바람만 일렁일 뿐이었다.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고 집과 담장은 허물어져 마치 흉집처럼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온기라고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날로 밤으로/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용악, ‘낡은집’ 중에서)들만 즐비할 뿐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한 가족사의 몰락을 노래했던 이용악의 ‘낡은집’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오늘의 농촌이 식민지 시대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용악이 살았던 당대의 농촌현실보다 작금의 농촌이 보다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는 지도 모른다.
시는 본질적으로 이상주의자의 꿈을 언어로 빚어낸 삶의 한 양식이다. 시인이 꿈꾸는 세계는 각박한 삶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이상적 낙원을 실현하려는 데 있다. 그것이 단지 시인이 언어에 존재하는 삶의 양식이라 할지라도 결핍된 현실사회를 극복하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강둑을 거닐면서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며 상실된 고향이 아닌 사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향의 보습을 보고 싶다. 내가 머물고 있는 영국사 근처의 마을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아니 강 건너 언덕빼기 마을에는 흉집이 더 많다. 그러나 나는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곳은 내가 돌아가 살아야 할 땅이기 때문이다.
강물은 봄날 같이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나무를 타고 올라 꽃을 피운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 꿈속이라도 내 사랑하는 여자와 손을 맞잡고 강 건너 마을로 들어가고 싶다. 끼니때가 되면 아궁이에 어김없이 밥을 끓이고, 쇠죽을 끓이는 생솔가지 검붉게 타는 집에 살고 싶다. 강물 위로는 청둥오리 떼들이 차디찬 물낯바닥에 낮게 깔리는 달빛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풍경을 보면서 살고 싶다. 백석은 ‘여우난골族’ 등 많은 시편에서 유년의 화자를 내세워 과거의 다복했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복원해 주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구성하는 갖가지 사물과 관습에 대한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적 삶의 원형을 형상화해 주었다. 따라서 회상된 경험들은 그 경험들이 이끌어낸 본디 모습보다도 더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농촌을 고향으로 두고 사는 현실적 삶은 대단히 고단해 보인다. 고향을 두고 사는, 현실사회의 어려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고향을 따스하게 가꾸고 싶다. 회상화된 경험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 무릇 사라지는 것들은 본래적 생의 원천이며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양문규 시인. 건양대 강사
양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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