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화통일 된 한반도의 모습이라며 압류해가더군요.” 임옥상 화백은 1980년대 초반에 그린 4작품을 당국에 압류 당했다. 땅의 ‘붉은 기운’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임옥상미술연구소

땅 Ⅱ, 1981

지난 1981년에 그린 ‘땅 II’는 수묵을 이용해 한반도의 모습을 그린 후 당시 창밖으로 보이던 ‘생채기’같은 공사현장의 붉은 흙을 표현했다. 1980년에 그린 ‘땅 IV’에도 붉은 흙이 등장한다. 광주에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보며 농민의 시각으로 항쟁을 그렸다.

반공분자라 손가락질 하며 작품을 빼앗아갔지만 임 화백은 그저 정체성의 터전인 땅을, 농촌을 그리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렇게 농촌을 바라보는 임 화백의 시선은 어린 시절부터 농촌과 도시를 오가며 변두리의 정서를 체화 시켰기 때문이다.

임옥상 화백

농촌을 바라보는 임 화백의 따뜻한 시선을 듣는 자리가 마련됐다. 희망제작소 농촌희망본부가 지난달부터 농촌에 희망을 주고, 농촌에서 희망을 찾자는 취지로 기획한 ‘비농업인이 바라본 한국 농업·농촌의 미래’ 세미나에서다.

농촌의 이야기를 예술가에게 묻는다니 조금은 생소하고 어색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임 화백의 작품에는 땅과 농촌이 자주 등장한다. ‘반드시 농촌에 대해 그려야지’라고 작정을 하고 그렸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그림으로 풀다보니, 또 광주교대와 전주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연스럽게 농촌의 현실과 접하다보니 농촌은 임 화백의 삶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을 캔버스에 옮겨놓았다.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도시는 언젠가 폐허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폐허 위에서 잃어버린 땅의 힘을 살려내는 일에 매진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1983년에 그린 ‘행복의 모습’이란 작품에 대한 소개말이다.

같은 해에 그린 ‘보리밭 II'에는 농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임 화백의 근본적인 생각이 묻어있다. 보리밭 사이 농민들이 나무처럼 곧고 굳게 서있다.

“농촌은 결국 농민이 지켜내야 합니다. 농민들 스스로 공부하고 힘을 내야지 제도적 지원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에서 FTA다 뭐다 하며 농민들에게 미안하니까 그리 크지도 않은 돈을 지원해주면서 생색을 냅니다. 하지만 전혀 실효성과 생산성 없는 사업들을 하는 것을 보면 뭐하는 건가 싶어 답답해요. 농민이 먼저 깨어있어야 합니다.”

농민들 스스로 일어서기엔 많이 지쳐있는 게 현실이다. 1년 동안 애써 기른 농작물들은 풍작 때는 가격파동이 일어 ‘박스값’도 안나오고, 흉작은 흉작대로 중간도매상들이 가로채서 속만 상하고 몸도 상한다.

이들을 위해 예술가들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수작을 걸어야 합니다.” 다소 파격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예술가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에게 수작을 걸어야 해요. 농촌이야 말로 예술가들의 고향이면서 생명의 기원이라는 걸 알고 농촌이 기본이 됐을 때 모든 문화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작을 거는 것이지요. 이 때 주의할 것은 역시 주인은 농민이라는 점과 진정성을 살려 작게, 진짜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술가들은 한 번 ‘꽂히면’ 돈과 상관없이 며칠을 작업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사회에선 이들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임 화백은 강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예술가들 돈 못 번다고 몇 푼 쥐어주는 식으로 지원을 합니다. 우린 거지가 아닙니다.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잘 활용케 하면 될 텐데 문광부에 얘기했더니 좋다고는 하지만 답이 없네요.”

임옥상미술연구소

보리밭 Ⅱ, 1983

지금의 임 화백이 있게 한 것은 ‘미술이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색깔과 형태로 표현해내는 것’이라는 명제였다. 이를 위해 자신의 사상과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미술은 시대의 반영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지 등에 관심을 갖고 역사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 어지러운 시대상황은 예술가들을 추상주의로 빠지게 했다. 하지만 임 화백은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은 그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대의 현실과 나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임 화백은 그렇게 민중예술가로 서민에게, 농민에게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다가갔다.

최근 임 화백은 생태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다.

“캔버스나 벽과 같이 죽은 대상이 아니라 나무나 꽃과 같이 살아있는 생명체에 작품을 설치해 같이 자라나며 그 과정들도 모두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상상하고 있어요. 이런 걸 농촌에서 한다면 너무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농촌을 자본의 논리로 봐선 안돼요. 상상력을 가지고 농촌이, 땅이 갖고 있는 힘을 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죠.”

언젠가 가까운 미래 어느 시골 마을에 임 화백의 작품이 설치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것 같다.

전상희 기자

전상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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