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실업자분들이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빈곤한 생활과 지역의 변화를 이끄는 주체적이고 혁신적인 사회적 기업가로 변화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신명나게 하고 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주주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기업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일반기업이 고용을 기피하는 중장년 퇴직자나 청년실직자, 장애인, 경력 단절 여성 등을 고용하기 위해 운영되거나 부족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을 실현하는 새로운 기업들이 많이 만들어져서 지역사회의 주거, 재생에너지, 재활용, 보육, 간병, 문화, 지역축제, 장애인 교육과 이동, 공정무역 서비스 등에서 활약하며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면 아마도 10년 후 쯤에는 일본의 유후인이나 노자와구미 마을도 부럽지 않은,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지역 활성화가 가능하리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있는 노동

성인에게 있어 의미 있는 노동이란 단지 생활유지를 위한 소득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자존감 회복과 비전찾기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일깨워준 분은 다름 아닌 7년전 내가 일했던 지역자활지원센터의 집수리사업단 대표님이셨다. 이분은 1년여간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하시다가 내가 일하던 복지관의 쉼터에 입소하신 후 노숙자분들의 직업재활 사업으로 시작된 집수리 사업단에 참여하여 유능한 도배기능공이자 자활공동체의 대표로 활동 중이셨다. 자활센터 내에는 14개의 자활사업단이 있어 대표들간에 정례 운영회의를 열고 있었는데, 마침 이분의 환갑을 맞아 해체된 가족을 대신하여 함께 잔치를 준비하게 되었다.
기쁨과 함께 가족의 빈자리를 느끼며 회한에 젖던 아저씨께서 일어나시더니 “얼마 전 실습을 겸해 영구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소녀가장의 무료집수리를 하였는데, 그때 일하는 내내 잔손이 가던 일을 돕던 아이가 돼지저금통을 깨서 마련했다며 음료수 한 병을 수줍게 내밀더라. 내 평생 이보다 따뜻하고 진심어린 인사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왜 가족들에게 이런 감동을 못주고 소홀했을까 반성도 되고, 다시 기회가 온다면 가족들에게 내가 내미는 월급봉투가 그 금액 이상의 가치를 지닌 값진 노동의 대가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을 텐데” 라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모두가 숙연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현재 일하는 실업극복국민재단이나 자활지원센터는 모두 부모(성인)의 자립을 돕는 조직이다. 그런데 실제 내가 이러한 일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가난한 아이들의 환경개선과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가장 근본적인 활동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 1990년부터 외환위기 직후까지 10년을 여성노동자의 자녀보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탁아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고민 많던 대학시절 잠시 취업했던 공장에서 만나 서로의 손에 박힌 용접상처를 걱정해주던 여공 친구들의 삶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지만, 잡역부로 일하는 엄마 아빠가 일하러 간 사이 방문을 잠근 단칸 셋방에서 놀다가 화재로 죽어간 혜영이와 용철이 남매, 인천의 세 쌍둥이 등 아이들의 죽음을 접했기 때문이다.

"방문 잠그지 말아요"

아이를 맡길 곳도 비용도 없었던 부모님이 출근 준비를 하며 방문을 잠그려 할 때마다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싹싹 빌며 ‘위험한데서 놀지 않을 테니 잠그지 말아 달라’고 절규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의 추모식에 서서 ‘다시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 아닌 죄로 마음대로 뛰놀지도 못하고 어이없는 죽음도 맞이하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인근 대학 선후배들과 함께 노동탁아소를 만들어 ‘엄마(기혼여성노동자들)에게 일할 권리를, 아이들에게는 보호교육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공간인 노동탁아소를 설립하고 운영해 온 것이다.
이제는 당시 우리가 외쳤던 구호대로 ‘동네마다, 우체국 수만큼 탁아소(보육시설)’가 설치되었고 아이들의 안전과 교육이 보장되고 있다. 경제성장기로 여성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던 1990년대 중반까지는 보육문제 해결이 최우선 과제였던 반면 외환위기 이후로 한국사회는 너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인한 가장실직자가 증가하고 일자리도 양극화 되는 가운데 가난의 고리를 끊어낼 직업 찾기도 쉽지 않다. 이에 더해 이혼증가로 인한 여성 가장세대도 증가해 여성의 사회진출은 더 이상 배부른 자아실현의 욕구가 아니라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부모의 실직은 파생되는 2차적 문제들인 알콜중독, 가정폭력, 빈곤, 자녀유기, 가족해체 등을 불러온다.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이러한 상황에서 위협받고 불안감에 떠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이 주어줬으니 발달과업을 완수하라는 요구는 버겁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부모의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 찾기에 나서게 된 것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또 다른 의미 있는 활동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내 인생의 스승이자 이정표를 제시해 준 사람은 가난한 가족이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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