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은 매우 단순하다. 이 현지 회사에서 합법적인 절차에 걸쳐 노조가 설립되어 단체협상을 제안하였지만 사측은 노조의 적법성을 문제 삼아 단체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사측의 문제제기는 행정절차에서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근거 없다는 결정이 나왔고, 그런 후에도 사측이 단체협상을 거부해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사측은 불법파업, 근무지이탈 등을 이유로 파업 참가자가 전원을 해고시켰다. 그리고 최근에 회사 밖에서 밤샘농성을 하던 두 여성노동자가 괴한에게 손발이 묶이고 눈과 입에 테이프가 붙여져 납치되어 경제특구 밖 도로변 웅덩이에 버려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수십 건에 이르는 관련 진정, 소송자료를 검토하고 필리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 노동관계법령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측 대표, 노동부 차관, 국가인권위 조사관 등과 만남을 가지고, 관련 단체, 노조원, 그리고 납치 피해자 등과 면담을 했다. 경제특구, 파업현장, 납치현장 등을 답사하기도 했다.
사측의 입장은 공식적으로는 결정이 난지 이미 1년이 넘은 대법원 판결문을 아직 받아보지 않아 그 내용을 모를뿐더러 이에 구속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솔직한 대화에서는 노조만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필리핀 노동법은 한국과는 달리 부당노동행위로 소송 등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노동부 산하 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의 확인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절차가 보통 5년에서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민사소송도 한 20년 걸릴 수 있다지요.” 사측 대표의 발언이다.
더 가관인 것은 사측을 대리하는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경비업체가 이 회사의 경비업무를 맡게 된 며칠 후 납치사건이 발생하였고, 납치피해자들이 버려진 곳이 이 경비업체 사무실에서 불과 2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법은 나의 편, 약 오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사관 관계자는 ‘주권의 존중’ 만을 이야기했고, 노동부 차관은 국제노동기구와 미국정부기관에서도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자신들은 법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자세를 보였다. 노조원들과 면담을 하면서 두어 번 함께 울었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가진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협약내용이야 어떻게 되었든 협상에 임하기만이라도 하면 안되나요.” 현지 노동자들의 순진함에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70년대 한국의 노동현장과 같은 그곳에서 30여년간 쌓아 온 노무관리의 기법과 필리핀법의 허술함을 극단적으로 활용하고 폭력조차 서슴치 않는 사측을 보면서 분노했다.
떠나오기 전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모든 관련 진정, 소송자료를 복사하고, 그리고 출발 당일 아침 일찍부터 공항행 차량에 동승해서까지 복사한 자료들을 분류하고, 수십 개의 별도 파일을 만들어 제목까지 달아 넘겨주면서 ‘더 필요한 자료 없으세요?’라고 물어오던 납치피해자의 그 맑은 눈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
황필규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 변호사
황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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