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새로운 사회도 만인이 같은 권리와 의무를 누리는 사회가 아니라 ‘남성’들만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며 지배자로 새롭게 등장한 사회였다. 보편적 시민권 즉 인간해방을 주장하며 프랑스 혁명을 추진했던 남성들도 여성의 시민권에 대해서는 거부했다. 여성의 시민권이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고 가부장제 가족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1789년 작가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인권을 배제하고 있는 인권선언과 별도로 여성의 권리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성의 권리선언 제 10조 즉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는 선언을 남기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조차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기본적인 권리인 참정권(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획득한 것은 1946년이었다.
영국의 여성참정권자들은 수상의 저택이 있는 다우닝가 10번지 정원 말뚝에 몸을 사슬로 묶은 후 경찰들이 사슬을 끊고 무력으로 끌어낼 때까지 여성의 인권을 외쳐댔다. 에밀리 데비슨은 1913년 경마가 벌어지는 날 여성 참정권을 외치며 말 밑으로 몸을 던졌다. 그 말은 국왕 조지 5세의 말이었다. 그녀의 죽음 후 영국에서는 1918년 비로소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고 10년 후인 1928년에 이르러서야 남성과 마찬가지로 21세가 넘으면 투표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1948년 헌법제정과 동시에 서구여성들이 희생과 투쟁을 통해 획득한 참정권을 ‘댓가 없이’ 보장받았다. 그러므로 참정권을 획득하기는 했지만 여성의 참정권은 진정한 남녀평등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은 단지 투표권이라는 형식적인 권리일 뿐 정치권력의 획득, 정책결정과 직결된 피선거권에는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웠었다. 그러나 한국 민주화과정에서 여성들은 민주화의 핵심적인 동력이 되어 당당히 시민권을 쟁취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의 민주화공고화시기 동안 우리사회의 새로운 정치개혁 주체로 제시되었던 386세대를 통한 정치적 세대교체나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진보정당,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시민정당 논의 등 정치적 대표성을 인정받고 있는 그 어디를 돌아보아도 여성들은 적극적인 주체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2007년 대통령선거는 여성들에게 여성정치대표성의 획기적인 전환이 될 수 있었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실험하는 계기가 될 수 있어 보였다. 여성들이 당당하게 최고의 정치권력에 출사표를 던졌고 그것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거부되지 않았다. 박근혜, 한명숙, 심상정 후보 등 여성정치가가 남성정치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보수·진보 정당의 당당한 경선후보가 되어 경쟁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중 어느 누구도 최종후보가 되지는 못했다. 정작 각 정당의 여성후보들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이 되어 줄 여성들을 위한 차별화된 정책을 갖는, 그래서 당내 여성들을 집단적 주체로 조직화할‘여성의 정치적 대표’가 되지 못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진행된 데에는 여성계의 책임도 있었다. 여성계나 대선 예비여성후보들이나 남성들이 더럽힌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일수 있는 사람은 ‘여성’이어야 된다가 아니라 ‘어떤 여성’이어야 하는 가의 문제를 놓고 스스로 족쇄를 찼던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것도 아니고 각 정당이 자신의 정당강령과 정책에 맞는 ‘당 대선 후보’를 뽑는 과정에서 여성계도 각 당의 여성후보들도 서로 연대하여 하나의 전선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2007년 대선도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단 한명의 여성후보만 있었더라도 지금같은 상황까지 되지는 않았을텐데.’ 이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정책과 공약은 사라지고 현실 정치의 부정부패공방, 무지하고 무능한 운동권 권력에 대한 짜증, 부동산, 주식, 펀드만큼도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지 못한 정치무관심과 무기력, 이것이 투표 이틀을 앞둔, 민주화 권력 10년만의 정치현실인 것이다. 대선판은 지겹고 찍고 싶은 사람은 없는 현실. 기권해버리면 뭐가 달라질까.
절반의 여성유권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여성의 행복지수를 높이겠다는 어떤 남성후보도 여성문제를 스스로 ‘주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주체’인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요구할 때 그들은 겨우 여성문제를 수동적으로 인식할 뿐이다. 절반의 유권자 여성이라는 형식적인‘숫자’때문이에라도 그들은 공약(空約)이 될 줄 알면서도 여성에게 허울뿐인 장밋빛 약속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공약(空約)이 아니라 ‘공약’(公約)이 되도록 할 힘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5년에 한번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그런 투표를 하지 말고 각 후보들의 ‘여성공약’을 꼼꼼히 따져보고, 찍고, 책임지고, 감시해서 5년 동안 자신이 찍은 후보가 공약을 실천하는 ‘종노릇’하게 만드는 투표를 하자.
절반의 여성유권자임에도 불구하고 늘 비효율적인 정치적 소수 즉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내키는 대로 표를 던지며 자신들의 이익을 결집하거나 표출하지 못하는 여성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중요한 진짜 정치적 다수가 되자.
오유석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공동대표
오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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