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소리’에 대한 변명

[시민운동 2.0] 안태호l승인2008.01.1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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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 분들 중 많은 분들은 ‘늘 똑같은 소리만 한다’는 비판을 적지 않게 받아왔다. 그럼에도 그 분들이 똑같은 얘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 가지일 게다. 한국 사회가 전혀 바뀌지 않았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더 나빠졌으니까.”

‘한국 최초의 전문 인터뷰어’로 불리는 지승호의 열한번째 인터뷰집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에는 인터뷰이들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이 실려있다. 지승호가 만난 ‘똑같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은 박노자, 홍세화, 김규항, 한홍구, 심상정, 진중권, 손석춘 등 우리시대를 대표할만한 진보적 지식인들이다.

최근 몇 년간 단체에서 활동해 오면서 나는 이와 비슷한 느낌을 꽤 여러 차례 받았다. 주변에서 “거 왜 매번 똑같은 얘기들만 하는거냐, 지겹지도 않느냐”라는 질타를 하는 이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언제까지 이렇게 같은 말들을 반복해야 할까’라는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이다.

지난 2002년, 내가 활동하고 있는 민예총을 비롯한 20여개 문화예술단체들은 대통령선거를 맞아 단체별 지향에 따른 수많은 정책들을 대상으로 여러 번의 집중적인 논의과정을 거쳐 ‘우리는 문화대통령을 원한다’라는 제안서를 발표했다. 당시 이 제안서는 16개의 핵심공약 및 100대 주요과제를 상정하고 있었다. 핵심원칙은 산업적 교역 중심에서 공존과 교류 중심으로 문화정책 기조 변환, 문화의 공공재적 특성 및 다양성을 강조하는 ‘문화민주주의’의 실현 등이었다.

전자가 문화를 주변적이고 산업적인 논리로만 바라보는 데에서 벗어나 정치 및 경제와 함께 인간 삶의 3대 요소 및 인간 삶의 총체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출발점에서 문화분야의 WTO 양허요구안 제출 철회 등의 제안을 끌어내고 있다면, 후자는 누구나 손쉽게 문화를 누리고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각종 법제 및 운영기구 개혁과 다양한 문화향유 권리를 실현시킬 방안을 제안하고 있었다.

한때는 이러한 제안들이 현실화되는 듯도 보였다. 참여정부 초기의 문화정책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시민사회와의 싱크로율을 높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창의한국’과 ‘새예술정책’이라는, 현장예술인 출신 장관의 주도로 마련된 문화정책의 중장기 로드맵들은 오랫동안 문화예술계에서 소망하던 꿈들을 이루어줄 ‘예언서’로 뜨거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원칙적인, 너무도 원칙적인 차원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실제 문화예술이 국정운영에서 중요도를 가지고 생명력을 확보해 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달랐다. 참여정부의 두 번째 문화부장관으로 들어선 정치인은 때마침 거세게 불어닥친 한류열풍을 발판으로 문화산업의 기치를 불끈 들어올렸다. 창의한국, 새예술정책이 갖고 있던 잠재력은 결국 문화산업의 거센 물결 속에 너무나도 손쉽게 사장돼버리고 말았다.

예술의 가치는 드라마가 올리는 수입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지역문화의 균등한 발전은 전 국토의 개발로 여겨졌으며, 지자체별로 대형문화시설을 유치하는 것이 곧 문화예술의 발전과 등치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여가문화정책 운운하며 골프장을 확대하고 대규모 관광단지를 개발하더니 급기야 스크린쿼터 축소와 한미FTA 체결로 문화예술과 사회공공성을 극단적인 위기에 몰아넣기까지 이르렀다. 창의한국과 새예술정책은 전설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전설을 따라가보면, 최근 문화부의 한 공무원이 “창의한국에 명시된 정책 중 실현된 것을 알려달라”는 국회의원 보좌관의 요구에 대해 “창의한국이 뭐냐”고 되물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에 이르게 된다.

지루한 반복이 지속되었다. 문화를 수단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산업적 관점에서 문화예술을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문화예술은 시민들의 삶의 기초를 이루는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공공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문화는 교역의 대상이 아니라 교류의 대상이다…. 2002년, 아니 그 이전부터 계속 반복되어 온 의제들은, 바뀌지 않았다기보다 더욱 악화된 현실에서 여전히 그 필요성을 주장해야만 했다. 아마도 이는 문화예술계 뿐 아니라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는 많은 이들이 하나같이 겪는 지리함이리라.

민예총이 2006년 지방자치 선거 당시 발표한 ‘문화자치를 위한 민예총의 7대 제안’, 지난 대선에서 발표했던 ‘토건국가를 넘어 문화국가로’ 역시 결국에는 모두 2002년도의 변주이거나 다른 버전이었다. 아무리 지겨워도, 귀에 딱지나는 소리가 들려도 어쩔 수 없다. 현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그 현실에 대한 분석과 처방이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문화공공성을 이야기하고, 문화민주주의를 강조해야 할 것 같다.


안태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정책기획팀 활동가

안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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