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호칭, 변화는 시작됐다

여성민우회, '호樂호樂 캠페인' 백서 발간 전상희l승인2008.01.2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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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배우자 등 성차별 용어 개선 움직임

누나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뽀송뽀송한 얼굴로 누난 내 여자니까 너라고 부르겠다는,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주겠다는 열아홉 살 가수 이승기의 등장은 순간이었고 환상이었다.

하지만 누나들은 가슴이 답답했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오빠들에게 오빤 내 남자니까 너라고 부르겠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보지도 못한 채 결혼을 했다. ‘집사람’이 되어 자기들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존대를 해야 하는 ‘아가씨’와 ‘서방님’은 현실이었고 일상이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호칭을 통해 상대방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규정지으며 살아간다. 여성운동이 발전하면서 사회적으로 성차별적 호칭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으나 아직 그 영향력은 미비하다. 더욱이 가장 친밀하기 때문에 가장 바꾸기 어려운 가족 내 호칭엔 여전히 성차별적 사고가 존재한다.

한국여성민우회
호樂호樂 캠페인 홈페이지 첫 화면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2006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가족 내 평등한 호칭문화를 만들기 위해 여성들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해보는 '호樂호樂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을 묶어 ‘호칭에 대한 모든 이야기-호樂호樂 호칭백서’를 발간했다.

평등 호칭문화와 관련된 연구나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그 동안의 활동과 관련 정보 등이 모두 들어있다. 캠페인에 동참했거나 호칭문화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자들에게는 배포가 된 상태이고, 민우회 지부에도 참고자료로 활용하도록 보내졌다. 홈페이지를 통해 필요한 사람들은 구입도 가능하다.

여성가족부의 후원으로 진행한 이번 사업은 2006년 연말부터 2007년 연초에 걸쳐 호칭을 매개로 한 가족 내 갈등과 경험을 나누며 공론화하는 첫 번째 캠페인으로 시작됐다.

‘신선하다’, ‘그 동안 혼자 속으로 고민하던 이야기라 속이 후련하다’ 등의 긍정적인 관심도 있었고, 의도와 다르게 어원 논쟁까지 불거지면서 ‘공부 좀 더 해라’, ‘그냥 이대로 살지 왜 그러냐’는 등 공격적인 댓글들은 부정적인 관심이었다.

지난해 10월부터 펼쳐진 두 번째 캠페인에서는 가부장적 가족문화, 성역할 고정관념이 반영된 호칭사용의 문제를 지적하고 새로운 호칭을 고민해 제안하는 활동들이 중심이었다. 가족호칭으로 인한 관계에서 느끼는 불편함 인식조사를 바탕으로 평등한 만남과 소통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었다.

첫 번째 캠페인이 시작되자 민우회 담당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경험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남겨졌다. 10살 아래면서 올케에게 첫 대면부터 반말을 하던 시누이에게 ‘아가씨’라 불려야 했던 한순애 씨, 아내들은 양가 부모에게 ‘아버지, 어머니’라고 하는데 남편들은 왜 아내의 부모에게 ‘장모, 장인’ 등 낮춤 표현으로 쓰는지 기분이 나쁘다던 김보영 씨,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남편의 어린 사촌동생에게 반말을 했다가 일가친척들 앞에서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혼이 났다는 ‘종손맞며느리’ 등. 실제로 자신들의 경험과 그로 인해 생긴 고민의 흔적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백서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민우회는 한 가지 실천과 다섯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집사람’이나 ‘바깥양반’ 대신 의미가 익숙하고 성별에 따른 차이가 없는 ‘배우자’란 단어를 쓰자고 제안했다.

또한 다섯 가지 제안 아이디어는 평등한 호칭 문화를 위해 부부간 서로 존중하는 호칭과 말체를 사용할 것, 양가 부모님께 똑같이 어머님·아버님이라고 부를 것, 아가씨·도련님과 처제·처남에겐 동등한 존중과 친밀함을, 배우자 동생들에 대한 호칭의 다양화, 나이와 항렬에 어긋나 호칭이 불편할 때 대화로 새로운 호칭 모색 등을 내용으로 한다.

두 차례의 캠페인을 통해 변화의 흔적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번 캠페인을 담당했던 민우회 활동가 다라 씨는 “우선은 큰 변화를 바라고 시작한 캠페인은 아니다”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론장을 만들며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에 중점을 둬 백서로 발간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 획을 그을 만한 변화의 흔적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일상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과 대안을 공유하는 자리가 조금씩 많아졌다. 이번 캠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호랑이’들은 평등한 호칭문화를 사랑하고 이번 캠페인을 알리며 피드백을 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 중에는 남성도 있었다.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가정 내 성차별적 호칭이나 행동 등에 대해 다른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변화하는 기점으로 삼기도 했다. 작지만 큰 변화의 시작이다.

결혼한 지 10년차인 주부 노경순 씨는 이번 캠페인을 반기며 적극 동참의 뜻을 밝혔다.

“가족호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지금껏 써온 말들을 나 혼자 바꿀 수도 없고 해서 속으로만 끙끙댔습니다. ‘아가씨, 서방님,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등 차별적 호칭은 되도록 안 쓰려고 노력해요. 나한테는 이런 용어들이 중요한 문제인데 다른 사람들에겐 안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세상은 변합니다. 그냥 관습화 된 것을 꼭 지켜야 할 풍습으로 여긴다면 안 됩니다. 바꿀 건 바꿔야죠.”
전상희 기자

전상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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