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는 기만이다

이재영_독설의 역설 [42] 이재영l승인2008.04.2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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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류수 같이 순수한 이념은 없다. 이념형적인 정치도 없다. 정치이념은 시대의 영향이든, 정치세력이나 정치인의 특성이든, 또는 우연이든 여러 요소에 의해 굴절되기 마련이다.

재야 시절 다져진 시혜적 형평의 정서가 신자유주의에 굴복 굴절된 것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이념이었다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지만 박정희 시절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것이 이명박 정권의 현실 이념일 게다.

이러한 이명박 정권의 ‘짬뽕’에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 의장이 ‘순수 신자유주의’ 입장에서 시비를 걸고 나섰다. 그는 여러 자리에서 “시장을 못 믿고 정부가 힘으로 개입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정부가 좌파 행태를 못 벗었다. 환율 등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이명박 정권의 최근 정책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한나라당끼리 싸운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지 꽤 오래 지났음에도 야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말하지 않기야 않았겠지만, 민주당, 진보정당들, 노조나 시민단체들은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바야흐로 여-여 경쟁 시대가 열린 듯하다. 상황은 1956년 일본 자민당의 첫 집권 때보다 더 심각하다. 사회 의제가 여당 안에서의 쟁투에 독점돼 있거니와, 자유주의 정당이나 급진정당들이라는 게 도대체가 집권 능력은커녕 집권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현재의 야당세력들은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야당만큼이라도 강성인가? 기껏해야 ‘386판 한나라당’이거나, 일본식 노조운동-시민운동의 한국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작금의 고요는 자민당의 38년보다 더 길어야 정상이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긴 호흡과 차분한 준비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모두들 ‘풀뿌리’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사회 곳곳에서 대안 권력을 구축해나가는 장기적 노력을 일컫는 것이라면 옳다. ‘진지전’이라는 그람시의 정리 이전에도 이런 방식은 모든 인간 사회 변화의 정도(正道)였다.

그런데 한국에 소개돼 있는 ‘풀뿌리’란 주로 미국과 일본의 탈사회주의적 비정치 사회운동에 다름 아니다. 가장 앞선 풀뿌리 모델이라는 독일의 녹색당조차 사민당의 판단에 그 운명이 좌우될 만큼 위약하고, 미국과 일본의 암울한 현실이 반세기 동안이나 요지부동인 것은 그 풀뿌리라는 것이 이미 인민의 파괴적 도전을 완충시키는 ‘체제의 풀뿌리’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장제를 넘은 무한복제의 시대에 수공업적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또 하나의 러다이트다. 물론 우리는 오래 인내해야 하고 노력은 훨씬 진지해져야 한다. 그러나 시간은 오랜 산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정치를 위해서다. 산개된 열은 시간이 흘러 다시 식고, 공간적으로 집중된 열은 시간적 축적에 의해 물을 끓인다.

‘자민당 시대’에 진짜 필요한 것은 이기적 정치다. 메마른 풀밭에 날아든 나무 씨앗은 다른 씨앗을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살아 그늘을 이루어야 또 다른 씨앗들이 날아들 수 있고, 전이(轉移)를 이룰 수 있다. 생태계의 변화는 우점종 전체의 진화가 아니라, 비우점종의 개체 확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나라당 독재를 끝내야 된다’거나, ‘한미FTA를 저지해야 한다’거나, ‘비정규직을 살려야 한다’ 같이 고매한 이상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당위나 대의명분 같은 것도 자신의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비하거나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야멸차게 버리는 마키아벨리의 정치를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바의 정치란 무엇인가? 제 얼굴에 똥칠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민의 미래를 위하는 길이라면.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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