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여자들’의 세계

서평/박문영 『지상의 여자들』 백지연 문학평론가l승인2019.07.1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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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르 귄(Ursula K. Le Guin)이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SF(science fiction)의 특징을 ‘밤의 언어’로 명명했듯이,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세계를 보여주기에 SF만큼 무한한 영감과 가능성을 제공하는 장르도 없는 듯하다. 최근 한국소설에서 SF장르와 페미니즘의 상상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접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 SF와 관련하여 듀나, 정소연, 김보영, 박문영, 김초엽 등이 발표하는 작품 역시 독자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박문영의 『지상의 여자들』(그래비티북스 2018)은 한국사회의 가부장 폭력과 소수자 차별에 대한 비판을 미래사회의 상상력과 연결한 독특한 SF소설로 주목된다. 소설은 이주민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화를 내는’ 남편들이 사라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도입부는 공교롭게도 베트남 출신 이주 여성이 남편에게 폭행당한 최근의 실제 사건과 겹쳐진다. 사건 당시의 잔혹한 학대 현장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면서 사람들에게 깊은 분노와 충격을 안겼다. 국적 취득과 영주권 신청과 비자 연장 등에서 배우자 신원보증을 받아야 하는 결혼 이주여성의 불안한 삶이 다른 사회적 이슈들에 묻혀서 방치되고 있음도 새삼 환기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가정 공간에서 무심히 행해지는 학대와 폭력이 여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은폐되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문학예술의 분야에서 근 몇년간 페미니즘의 주제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렇듯 일상에 잠긴 차별과 폭력의 관성에 대한 문제들이다. 래디컬한 입장을 내세우는 최근의 페미니즘 서사들은 현실사회의 혐오와 폭력에 대응하는 여성의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출한다. 유토피아적이고 평화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고전적 미래 서사의 구도와 달리 적극적인 복수로 현실에 맞서는 것이다.

미국의 영문학자 일레인 쇼월터(Elaine Showalter)의 말대로 최근 페미니스트 판타지는 “남성의 폭력을 용서하고, 봐주고, 감추고, 수용할 의사가 없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를 반영”하고 있다.(일레인 쇼월터 「폭력을 상상하기」,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329면) 『지상의 여자들』에서도 폭력적인 남성들이 단숨에 ‘처리’되는 방식으로 ‘휴거’가 이루어진다. 남성들의 휴거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가부장적 전언을 시니컬한 방식으로 뒤집는다.

『지상의 여자들』에서 폭력적인 남자들이 사라지면서 여성들만의 세계가 건설된다는 이야기의 구도는 성별이 폐지된 미래사회를 다루는 SF문학의 여러 고전을 떠오르게 한다. 이 소설에서 폭력적 가부장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외계’의 힘이 개입하는 설정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남자들이 실종되는 순간 나타나는 독특한 ‘빛무리’는 외계적인 존재를 상징하지만 그 실체는 명료하지 않다. “지구 밖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뭔가를 계속 감지하고 있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지. 네 말대로 이건 감염이 아니야. 그들이 화내는 남자들을 선택해서 데려가고 있어. 이제 나는 그게 어떤 종류의 화인지 궁금해”(189면)라는 인물의 말처럼 독자도 이 외계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소설은 그에 대한 설명 대신 실종 ‘이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기존의 페미니즘 SF서사가 특정 성별의 ‘멸종’ 혹은 ‘완전한 분리’라는 구도 속에서 미래사회를 상상한다면, 『지상의 여자들』은 ‘구주’라는 특정한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다룬다. 처음에는 ‘구주’에 거주하는 중장년의 군필자, 폭력적 성향의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남자들이 실종되기 시작하지만, 점차 실종의 사례는 광범해지고 다른 지역으로 확대된다. 당국은 실종된 남성들의 ‘전염병’을 의심하며 ‘구주’ 지역을 폐쇄하기에 이르는데 그 배경에는 이 지역에서 막무가내로 추진된 환경개발의 폐해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판단과 달리 남자들이 사라지면서 구주시(市)는 ‘여성들이 살고 싶은 도시’, 실험적인 도시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공무원들이 여성으로 바뀌고 가사노동에 대한 가치평가가가 변화하는, 여아의 탄생이 축복받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폭력적인 남자들이 사라진 ‘구주’의 세계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된 것일까. 소설은 이성애 결혼이 파기되고, 가족단위가 해체되고, 단성생식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는 구주의 세계를 꼭 이상적인 것으로만 단정하지 않는다. 선명한 대안세계의 형상화를 보여주지 않는 이 작품은 익숙한 장르 패턴에 귀속되지 않는 망설임과 조심스러움을 보이면서 독특한 페미니즘 서사의 결을 형성한다.

성폭력을 겪었던 성연이 희수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느끼는 과정 역시 느리고 섬세하게 다루어진다. 구주시 폐쇄정책이 종료되고 돌아온 남편 형근이 성연의 결별 선언에 당혹스러움을 표하려는 순간 ‘실종’되는 장면은 “타인의 욕망을 헤아리면서 고압적이지 않은 자세로 대화를 이어가는 일”(316면)의 쉽지 않은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첫 장면은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폭력의 장면을 다시금 환기한다. “머리채를 거머쥐고 주먹으로 배를 치던 남자”에 시달리는 이주민 여성들의 수난 서사는 소설을 떠나 참혹한 현실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지 않은가. ‘죽어, 죽어라, 죽으면 좋겠다’라는 여성 인물의 독백에 담긴 깊은 분노는 “거슬리는 이들을 간편히 지워나”(259면)가는 ‘실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서사적 질문을 남긴다.

백지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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