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현명하고 총명하며 야비한 사람

철학여행까페[35]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6.0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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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오늘날 우리가 쓰는 에어컨과 공기정화기가 돌아가는 방을 상상한 사람이 이미 있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 날과 같은 카이스트를 만들 것을 주창한 사람이 있었다.

이동희
프랜시스 베이컨 묘지
근대 연 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뉴아틀란티스>라는 책을 통해 과학적 산업사회를 그리며 그러한 꿈을 품었던 사람이다. 베이컨은 과학을 통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강력하게 품었던 사람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제르노 뵈메가 언급했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베이컨이 구상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성과 과학을 통해 인간에게 유용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베이컨이 기획한 프로젝트였다. 그는 자연을 알수록 우리는 자연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고, 결국 자연에 대한 지식이 힘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는 것이 힘이다.”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을 주장함으로써 근대세계를 열었던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옥새를 담당하는 국새상서(國璽尙書) 니콜라스 베이컨 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73~157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는데, 그는 '비생산적'이며 ‘공허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에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인간의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위도 받지 않은 채 대학을 그만 두고 실무적 경험을 익히기 위해 1576~1579년 영국 대사 수행원으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귀국했지만 아버지가 막내아들인 그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는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1582년 법정 변호사 자격을 얻어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국회에서 의석을 얻어 대의원으로 활발히 활동했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만큼 출세 가도를 달리지는 못했다. 그는 1589년 여왕에게 바치는 〈충언의 편지 Letter of Advice〉, 〈영국 교회 논쟁에 관한 공고 An Advertisement Touching the Controversies of the Church of England〉는 그의 정치적 관심과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593년 스페인과의 전쟁비용으로 특별 보조금을 요구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안에 반대해 그는 여왕의 눈 밖에 난다. 대신 그는 1591년경 여왕의 총애를 받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친교를 맺었다.

에식스 백작은 여왕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베이컨을 법무 차관에 등용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에식스 백작은 베이컨을 위로하기 위해 거대한 영지를 그에게 선사하였다.

그러나 베이컨은 이런 호의와 환대를 베풀었던 에식스 백작을 배반하게 된다. 이 배반은 베이컨을 ‘가장 야비한 사람’으로 평가 받게 하는 계기가 된다. 1598년 에식스는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러 떠났다가 여왕의 허락도 없이 반란군과 휴전을 체결한다. 여왕은 분노해 백작의 관직을 박탈하고 반란죄로 1601년에 에식스 백작을 체포한다. 1600년 6월 베이컨은 변호사로서 자기 후견인인 에식스에 대해 죄를 묻는 재판에 참여했다.

거기서 그는 여왕을 옹호하면서 에식스 백작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베이컨은 재판이 끝난 뒤에 에식스와 친분을 유지하려 했으나, 에식스가 1601년 여왕을 납치하여 정적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그를 반역자로 여기고 그 사건에 관한 공식 보고서를 작성했다. 아무튼 은인이자 후원자에 대한 배신은 베이컨을 두고 두고 비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컨은 그렇게 여왕의 환심을 사서 출세를 하려 했지만 여왕의 시대에는 출세 가도를 달리지 못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가 출세하지 못한 것은 그가 여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동희
프랜시스 베이컨
엘리자베스 여왕 사생아 설도


그가 미남인 에식스 백작과 여왕 사이에 태어 난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몇 번이고 졸라서 지위를 얻으려 했으나 여왕은 이목이 두려워 냉담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여왕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가 즉위한 다음부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왕의 편에 서서 의회를 견제하고 왕권을 옹호하면서 왕의 총애를 얻은 그는 1603년에 기사 작위를 수여 받는다. 1607년에는 법무차관, 1613년에는 법무장관으로 발탁되었고 1618년에는 당시 최고 지위인 대법관에 임명되어 베를람의 남작이라는 작위까지 수여 받았다.

1621년 까지 베이컨의 권력은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군주에게 충성했고 총애를 받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받았다. 1620년에 나온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인〈신 오르가논 Novum Organum>, 과학을 재조직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거대한 계획인〈대혁신 Instauratio Magna〉의 저자로서 그는 학자로서도 최고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정점에 오르면 기다리는 건 내리막 길 뿐이 아니던가. 그는 1621년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왕을 옹호하며 의회와 대립하던 그에게 의회파는 28가지에 걸친 죄목을 만들어 그를 뇌물수수혐의로 고발한 것이었다. 그는 무죄탄원이 소용없는 것을 알고 순순히 뇌물수수 사실을 시인했다.

베이컨은 조그만 뇌물은 관행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인정했는지 모른다. 그는 뇌물이 절대 재판에 영향을 미친 적이 없다고 강변하면서 “니콜라스 베이컨 이후 대법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자기만큼 공정한 대법관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뇌물수수사건은 그가 공직을 사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4만 파운드의 벌금과 왕이 만족할 때까지 런던 탑 감금, 공직 보유 금지, 하원과 법원 관할지역에서의 추방 등 가혹한 판결을 받았다. 그래도 그는 그 재판이 공정하다고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지난 200년 동안 의회가 견책한 사건 가운데 가장 공정한 견책이었다.”

예순의 나이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이후로도 베이컨은 화려한 컴백을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는 정치보다 학문에 더 큰 꿈을 품고 인류를 위해 더욱 중요한 일을 하는 데 남은 삶을 바쳤다.

그는 영국 역사, 튜더 군주들의 전기 등을 집필하여 왕에게 바쳤고 교육개혁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그리고 〈바람의 자연사 Historia Ventorum〉(1622),〈삶과 죽음의 자연사 Historia Vitae et Mortis〉(1623),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써냈다. 그는 정치적 불명예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활발한 저술활동과 과학 활동을 계속 했다. 그가 죽게 된 것도 그의 열정적인 실험정신 때문이었다. 1623년 3월 말 어느 눈 오는 날 닭고기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냉동실험을 하다가 그는 찬바람을 맞고 독감에 결려 죽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최초로 과학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동희
<대혁신>
최초로 과학의 순교자 되다


그는 중세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오르가논을 대체하는 <신 오르가논> 이라는 작품을 썼다. 〈신 오르가논〉 1권에서 베이컨은 신뢰할 만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으려면 우리를 오류로 이끄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을 추구할 때 범하는 오류를 그는 '우상'이라고 불렀다. 베이컨은 특히 위험한 4가지 우상을 제시했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이다. 이 우상은 인류에게 공통적이며, 인간의 본성 안에 처음부터 내재한 결함이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이다. 이 우상은 개인의 지적 특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고유하고 유별난 경향을 갖으며 거기서 오류를 빚는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이다. 이 우상은 언어의 오해에서 빚어지는 오류이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이 우상은 실재를 잘못 파악해 보여 주는 철학체계를 가리킨다. 베이컨은 이러한 우상들을 제거하고, 사물들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찰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게 개별적인 사례들을 연구하면서 귀납적으로 조금씩 자연의 법칙에 다가갈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릴 때, 부정적인 사례의 중요성도 염두에 두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베이컨은 경험을 중시하는 영미철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며,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과학의 방법적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베이컨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왕립 학술연구원과 대학 연구소를 세울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그의 생애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이컨이 죽은 직후 사람들은 베이컨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의 손자인 찰스 2세는 1662년에 왕립영국학술원을 세우고 베이컨의 과학적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받아 들였다. 아마도 베이컨이 주창한 이 학술원이 없었다면 뉴턴 같은 인물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인 포프가 베이컨을 “가장 현명하고, 가장 총명하며, 가장 야비한 사람”으로 평했지만 베이컨은 미개척분야인 과학의 바다를 최초로 항해한 자로 그리고 과학의 순교자로 기억될 것이다.

한계를 넘은 혁신가

그러고 보니 그의 책 <대혁신> 표지가 바로 헤라클레스의 기둥 사이를 통과하는 배의 모습이 아닌가.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지브롤터(Gibraltar) 해협 사이에 서 있던 거대한 바위 돌출부를 의미하고, 이곳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 당시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인간이 탐험 가능한 한계의 상징이었다. 고대인들은 기둥을 넘어선 곳에 지구의 끝자락이 있다고 믿었고, 그 너머의 세계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컨은 그 너머의 세계로 항해를 떠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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