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한국사회는 진지한 탐색 중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이 말이 새삼스럽게, 아니 다소 생경하게 느껴진 데는 전적으로 촛불문화제 탓이다. 이 말이 노래가사인 줄 안 것도 촛불문화제 덕분이다.

5월에 이어 6월의 뜨거운 밤을 더욱 달아오르게 만드는 촛불문화제는 좌파와 우파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고 한다. 새로운 시위문화, 새로운 세대의 참여, 새로운 형식의 직접 민주주의.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들과 함께 우리 사회에 ‘민주공화국’을 일깨워 준 것은 촛불문화제의 공로라고 많은 이들이 언급한다.

공화국. 참 익숙하지만 낯선 말이다. 통치에 필요한 권력이 왕이나 특정 계급, 또는 종교적 상징 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민(公民)으로부터 유래하는 정치체제가 공화국이라고 한다.

쇠고기 촛불집회는 거대한 민주주의 학습장이었다. 지난 10일 경찰이 세운 컨테이너 바리케이트에 글을 적고 있는 시민의 모습.

우리나라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대통령에게 통치권을 부여한다. 투표가 그 절차에 있어서 민주적이고, 투표권을 가진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보통선거란 점에서 민주공화국의 가장 기본 요건 중 하나는 충족한 것 같다.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이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일단 통치권을 부여받으면 행사 과정은 어떠해도 상관없는가? 이는 한미 쇠고기 수입협정의 문제에서 출발한 촛불문화제가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게 던진 질문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장동진 교수가 책임번역하고 동명사에서 출판한 킴리카의 <현대 정치철학의 이해>를 다시 집어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책은 공화국에 대한 직접적인 소개서는 아니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세 가지 주요 논변을 소개, 평가하고 이를 보충하거나 대체하려는 대안적인 개념과 원칙을 제시하는 다섯 가지 학파를 검토한다. 전자는 현대 영미정치철학을 대표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 자유적 평등Liberal equality, 자유지상주의 Libertarianism 이며, 후자는 마르크시즘Marxism,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 시민권이론Citizenship Theory,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페미니즘Feminism 등이다.

전통적인 구분은 현대 정치철학을 우파에서 좌파로 단선적으로 비교한다. 이는 ‘역사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쟁점들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기 때문에 저자는 정치철학을 비교하고 현실의 쟁점을 반영하기 위해서 ‘정치이론이 공유하는 더욱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평등 개념’을 도입한다.

저자가 도입하는 평등 개념은 ‘각 시민들에게는 동등한 고려와 존경을 받을 권리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 개념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만큼이나 노직의 자유지상주의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저자가 비교하는 여덟 가지 이론 모두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다. 기본적 전제는 이론이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다. 즉 이론은 전제를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제는 여전히 설명되거나 해석되어야 할 대상으로 남는다.

저자는 ‘평등’이란 전제를 해석하기 위해 각 정치철학의 주장을 이용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질문시킨다. 이를 통해 각 정치철학이 자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 각각이 전제하는 평등관이 불완전해 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의도는 각 정치철학을 논파시키는데 있기보다 그 속에서 이들이 갖는 다원성을 밝히는데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현실 정치지형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각 정치철학이 갖는 다원성은 가장 적대적일 것 같은 이론 사이에도 친화성이 있으며 가장 가까울 것 같은 이론 사이에도 차이와 갈등이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저자의 비교 방법이 현대 정치철학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적절한 지를 필자가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필자가 보기에 저자가 지적하는 현대 정치철학의 공통 전제, 더욱 추상적이고 더욱 근본적인 ‘평등’ 개념은 공화국의 전제와 다르지 않다.

공화국의 기초는 평등한 국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권력이 하늘에서 국왕에게 주어지거나 총칼에 의해서, 핏줄의 순수성에 의해서, 일정한 기준 이상의 재산으로부터 나온다면 공화국이라 하기 어렵다. 그런데 현실의 공화국에서 ‘평등한 국민’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구이어야 하는가? 평등한 국민으로부터 나온 통치권은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가? 행사과정이 민주공화국의 이념, 가치와 충돌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국민은 그 행사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 2008년 6월. 우리 사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하게 찾아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유용하다.

킴리카의 이 책은 비록 다분히 이론적이지만 현대 정치철학에 대한 그의 분석 속에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구체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 킴리카의 이 책은 분량에서나 내용에서 쉽게 읽혀지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부단한 현실에서 꾸준히 지켜내고 새롭게 구성해야할 민주공화국을 찾아가는 길만큼이나 어렵지는 않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 주장과 책을 통해서라도 우선 소통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이 책을 함께 읽고 싶다.

백운광 두리미디어 편집주간

백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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