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 다짐

‘나이 차이 따윈 잊자’던 큰 화가 허백련의 추억 강상헌 논설위원/우리글진흥원장l승인2019.12.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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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모임이 한창이다. 그 첫 키워드(열쇠말)로 ‘망년’(忘年)을 띄운다. 잊고 있었던 우리의 멋진 전통의 정신을 되새겨보자는 것, 나이 따위 잊자는 얘기다. 해 년(年)은, ‘내 나이가 어때서’의 그 나이다. 이 나이는 사랑하기에도, 호연(浩然)하기에도 딱 좋은 나이 아닌가.

‘망년회’에 익숙해진 나머지 망년 즉 나이(연령)를 잊는다(망각)는 뜻이 얼른 와 닿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러나 원래의 뜻이다. 한 해의 다사다난 모두 흘려보내자는 의미 담은 흥청망청 그 망년회는 일제(日製) 수입품이다. 일제(日帝) 강점기에 그들이 가져온 미운 풍속(風俗)이다. 그들보다 문자의 전통이 오랜 우리는 원래 ‘나이를 잊는다’는 그 뜻으로 알고 썼다.​

고려 최고 멋쟁이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망년’ 주제의 캐릭터 같은 인물이다. 글 잘 쓰고, 옷 잘 입고, 허우대 말짱한, 게다가 센스까지 산뜻한 인물을 단박에 표현하는 참 멋있는 말이 ‘멋’이다. 그런 멋 때문이었겠지, 35세나 연상인 오세재(吳世材)의 눈에 들었다. 18세와 58세는 동무 되어 학문과 시(詩)와 정(情)을 주고받았다. 망년지교(忘年之交)다.​

<옥 같은 얼굴 이쁜 자태 백 가지 꽃 무색한데(玉顔嬌媚百花羞·옥안교미백화수)/ 술 또한 낙낙하게 잘 마시니 제일가는 풍류일세(第一風流飮量優·제일풍류음량우)/ 시 쓰는 이 웃으며 대해준 정 깊고 또 깊어(笑待詩人情最密·소대시인정최밀)/ 못나고 사나운 이 사람도 함께 놀아 주느니(醜狂如我亦同遊·추광여아역동유)>

‘꽃을 부끄럽게 한다’는 이름의 일류 기생 화수(花羞)에게 이규보는 그 이름자 아로새긴 시를 써주었다. 끝내주는 미녀가 술 매너에 맘씨까지 일품이라니. 어느 여인인들 이런 헌정(獻呈)의 노래에 가슴 뛰지 않을쏜가? 이쯤이면 ‘밀당’같은 건 의미 없다. 게임 끝! ​

‘기생 화수에게 주노라’라는 제목을 붙였다. 교과서에도 나온, 유명한 책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글이다. 당당한 품성이 보듬은 여유로운 멋을 아버지뻘 학자도 끔찍이 아꼈던 것이리라. 이규보, 기(氣) 살아 펄펄 날았다. 천하 명문의 동무 오세재, 얼마나 흡족했을까.​

흰 구름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음일까,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이름으로도 글을 쓴 그는 주몽이 주인공인 고구려 건국설화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써서 겨레의 혼백과 기상을 우뚝 세웠다. ‘점령군’ 몽고에 대해 고려의 참혹한 상황을 설명하고 너그러운 조처를 부탁하는, 그 결과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 ‘진정표(陳情表)’로도 유명하다.

무신(武臣)정권 시대, 기구한 문신(文臣)의 신세로 젊어서는 방랑자처럼 살았으나 중년 이후 내내 (글 써서) 잘 나갔다. 벼슬도 녹록치 않았다. 이규보의 문업(文業), 그 글의 바탕에는 망년지교의 놀랍고도 훈훈한 역사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세재는 ‘파한집’(破閑集)을 쓴 이인로 임춘 함순 등 당대 석학(碩學)들과 어울렸던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멋진 재목(材木) 알아보고, 정성으로 재능 섬겨 큰 그릇으로 빚어낸 업(業) 하나로 후세에 기억된다. 결국 글이나 학문보다 이 이야기로 유명하니, 사람 사는 보람은 참 여러 가지라 하겠다.​

회갑 챙기는 것은 어느덧 속없는 짓이 됐다. ‘한참 때’라는 말도 낡았다. 60쯤 돼야 뭘 좀 해볼 만하다고들 한다. ‘철들자 망령 든다’는 속담은 ‘철들면 늙는다’로 바뀐 지 오래다. 변화의 거대한 수레바퀴 놓치면 하릴없는 구닥다리 된다. 요즘 세태(世態)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늙어갈수록 더 푸르러서 아름다움 깊다.​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의 그림이 몇 년 전(2016년) 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에 걸렸었다. 70년대 무등산 기슭에서 어린 대학신문 기자에게 차(茶) 따라주며 그는 ‘위아래 없이 얘기하자’고 하셨다. 신선(神仙) 같던 그 할아버지, “친구라야 (우리 만남은) 더 귀하다.”고도 하셨다. 큰 화백의 가르침, 오래 남아 또 이렇게 전해진다. 망년지교의 현대적 캐릭터겠다.​

나이 말고, 인품과 학문의 높고 귀함을 까탈스럽게 따져 만나고 풍류와 바른 세상을 논하는, 상서(祥瑞)롭고 창의적인 모임이 망년회였으리라.​

이제 망년의 동무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야 할 때다. 더 큰 덕(德)은 나(의 나이)를 지우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아우들이 잘 돼야 형과 누나가 발 뻗고 편히 누울 게다. 시니어 세대도 그렇지만, 여러 세대에게 대개 통하는 바다. 멋이다. 풍류(風流)다. 게다가 회춘의 비기다. 잊고 있었던 진짜 ‘내 나이’다.

토/막/새/김

망(忘)자의 바탕글자인 망(亡)을 어원(말밑)을 따져 톺아보면 ‘사람이 망하고 도망가서 숨는다’는 뜻이다. 망신(亡身) 망명(亡命) 등의 말에서 실감난다.​

소리 같은 망(妄)자는 허망하고 망령(亡靈)됨, 거짓말 등을 이른다. 망언(妄言) 망동(妄動) 망상(妄想) 노망(老妄)의 ‘망’이 그 단어에서 그런 뜻을 가지게 되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망(亡, 妄)하기 싫으면, 부디 망(忘)하지 마시라.​

망(亡) 아래 마음 심(心) 붙으면 잊을 망(忘)이다. 心이 새로 만들어진 글자 忘에서 ‘(마음이) 잊음’이라는 뜻[형(形)]의 역할을 하고, 亡이 그 뜻 세우는 데 힘 보태는 동시에 소리[성(聲)]를 이루는 데도 영향을 미치는 형식으로 결합된 것이다. 이를 형성문자라 한다.​

한자는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의 네 가지 구성으로 이뤄졌다. 물건의 모양[形]을 그린[象], 그림을 기호로 만든, 최초의 글자인 상형문자를 써서 많은 새 글자 만들어내는 기발한 레고놀이가 한자의 내력이다. 심장 모양을 그린 心자는 상형문자의 대표라 할만하다. 이 이야기 따라가면 글 세상 밝아진다.

강상헌 논설위원/우리글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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