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세상의 종말와도 나의 철학 할 것”

철학여행까페[38] 이동희l승인2008.07.0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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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지요, 소크라테스가 독이 든 술잔을 들이키긴 했지만, 악법도 법이라며 실정법을 인정했다는 이야기, 그거 가짜입니다. 그리고 나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난 렌즈를 깍고 있을 사람이라구요.”

EBS 지식 채널의 'two Jobs, 스피노자의 이유'라는 프로그램 편에서 스피노자가 혼자 독백하는 이야기다. TV에서처럼 실제로 스피노자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그는 렌즈를 깎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렌즈를 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정신적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하이델베르크의 정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렌즈를 깎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유로운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e-지식 채널의 스피노자의 독백은 이렇게 되어야 맞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내 철학을 계속 하고 있었을 것이요.”

이동희
스피노자의 초상화
자유정신의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세상과의 접촉을 끊은 채 자신의 철학을 위해 가난하고 고독한 생활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가진 폭발성과 휘발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철학이 당시 사회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은둔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철학으로 인해 당시 유럽의 정치와 종교계를 뒤엎을 수 있는 ‘사상의 이단아’ 였다. 아니 안토니오 네그리가 표현한대로 그는 거룩한 것을 세속화 시킨 ‘야만적 별종’이었다.

라이프찌히의 유명한 철학 교수 토마시우스는 그를 “신을 모독한 전형적인 유태인이자 완전한 무신론자”이자 “끔찍한 괴물”로 묘사했고, 예나대학교 신학 교수 무제우스도 “악마에 매수당한 자”라고 표현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스피노자에게 이렇게 분노한 것일까? 혹 그가 유태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스피노자는 같은 동족인 유태인들에게도 분노를 사고, 파문을 당했다. 유태교로부터 파문은 유태인에게 사회적 사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파문을 당할 때 내려진 판결문은 그에 대한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 따라 바루흐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추방한다. 이는 성스러운 하느님과 성인들의 공동체가 허락한 것이다… 요수아가 예리코를 저주한 그 저주와 엘리사가 소년을 저주한 그 저주를 받고 율법서에 씌어 있는 그 모든 저주를 받아라. 밤낮으로 저주를 받을 것이며, 잠잘 때도 일어날 때에도 저주받아라. 나갈 때에도 저주 받을 것이며 들어 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말이나 글로써 그와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에게 호의를 보여서도 안 되며, 그와 한 지붕 아래 머물러서도 안 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며, 그가 저술한 책을 읽어서도 안 되느니라….”

스피노자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이길래 유태교와 개신교로부터 이렇게 심한 반발과 저주를 산 것일까 ?

스피노자는 1632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민을 떠났다. 그의 집안은 장사로 번창했으며, 유대인 사회에서도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1638년경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유대인 소년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랍비들로부터 탈무드와 기초교육과정을 배웠다. 1650년에 그는 한때 예수회 회원이었던 프란키스쿠스 반 덴 엔덴이라는 인물이 세운 학교에 들어가 고전 언어와 새로운 철학을 접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자유사상가와 교유하며 신 스콜라철학과 데카르트의 새로운 철학과도 접하게 되었다.

사상의 이단아

그가 22살인 1654년 3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스피노자는 이복동생인 누이가 유산을 모두 상속받겠다고 요구하는 바람에 법정다툼을 벌여야 했다. 스피노자는 승소했지만 거의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어차피 재산을 그녀에게 넘겨줄 것을 가지고 그가 그렇게 끝까지 법정 다툼을 벌인 이유는 자기에게 주어진 올바른 ‘권리’마저 넘겨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권리를 철저하게 찾고자 했던 것이었다.

1656년에 반 덴 엔덴 학교에서 그는 의사이자 자유사상가인 Juan de Pradod와 Manuel Ribeira와 함께 유태인 공동체가 신봉하는 신앙론에 대해 공공연하게 의심을 했다. 그는 구약성서는 모순투성이며, 애매모호하며, 구약성서만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신이 육체가 없다는 점, 천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 영혼이 불멸한다는 점 등을 뒷받침할 근거가 성서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했다.

당황한 유태인 공동체는 뇌물로 그를 매수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게 되자 그를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유태인 공동체는 1656년 7월 27일에 그를 파문했다. 판결문의 저주는 앞에 소개한 대로다. 이때 스피노자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그리고 아직 어떤 글도 발표하기 이전이었다.

유태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된 후 스피노자는 암스텔담에 머물면서 성서와 종교에 비판적인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기 위한 포괄적인 변호문을 작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견해는 나중에 <신학-정치학 논고>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같은 동족인 유태인 신앙공동체에서 추방되었다. 유태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된다는 것은 어떠한 보호막이나 사회적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유태인은 네덜란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유태인 공동체를 통해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해 살아갔기 때문이었다. 외톨이가 된 스피노자는 렌즈를 만드는 기술을 익혔고, 틈틈이 가정교사 노릇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 갔다.

이동희
스피노자의 렌즈 공방

유태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후 처음에 그는 암스테르담 근처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체계화할 목적으로 1660년 레이덴 근처에 있는 라인 강변의 조용한 마을 레인스뷔르흐로 거처를 옮겨 칩거에 들어갔다. 레인스뷔르흐에서 스피노자는 헤르만 호만이라는 외과의사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1662년 4월부터 〈신, 인간,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고 Korte Verhandeling van God, de Mensch en deszelfs Welstand〉(1662경, 초판 1852)와〈지성 정화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1677)을 집필했다. 그는 또한〈기하학적 방식에 근거한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썼다. 이 책은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유일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체계를 기하학적으로 규명하고, 그것이 지닌 결점을 드러내면서 데카르트 사상과는 다른 독자적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는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1662~75, 출판 1677) 제1권을 완성했다.

1670년에 그가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신학-정치학 논고> 라는 책을 출간했을 때, 그것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파장을 불러 왔다. 그는 이 책에서 국가에 대한 교회의 지나친 간섭은 통제되어야 하며,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적 신념의 자유를 보장해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정치와 종교 권력자들의 격분을 불러 일으켰다. <신학-정치학 논고>는 출판되자마자마자 신구교 모두와 국가당국은 물론 대학으로부터도 금지 당했다. 네덜란드 총독은 이 책을 인쇄하는 자나 유포시키는 자에게는 가장 엄한 벌을 내리겠다고 선언을 할 정도였다.

정부와 교회의 반발

스피노자가 <신학-정치학 논고>에서 어떤 주장을 했길래 정부와 교회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샀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시민의 자유로운 정신을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는 시민의 자유로운 생각과 그러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치권력자나 종교권력자는 그러한 그의 주장을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 들였다.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사상이나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는 기존 체제를 뒤흔드는 범죄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런 그들의 행위가 오히려 범죄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범죄나 악행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라는 이유 때문에 적으로 판정받고 사형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범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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