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해태

장발장 찌르겠다던 자베르는 물에 빠져 죽더라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l승인2020.07.2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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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文明)의 대표적인 얼굴 중 하나가 ‘법’이다. 그 법이 ‘인간’을 놓쳤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가 던진 큰 이야기의 화두(話頭)다. 이 주제, 아직 세상은 모르쇠인 척한다. 그게 편한가보다. 알면 다친다, 알아서들 요령껏 살 일이다, 이런 건가.

우리의 ‘춘향전’이나 ‘성웅 이순신’만큼 유럽과 미국서 인기 짱 레퍼토리인 ‘레미제라블’을 요새 만든 뮤지컬 영화로 봤다. 빵 한 조각 훔쳐 19년을 형무소에서 살아야 했던 장발장 곁에 여러 ‘인간’들이 선다. ‘법의 수호신’을 자부한 경감 자베르도 거기 한 축 낀다.

영화에서 장발장은 자신을 ‘법의 노예’라고 했다. 동화로 고쳐 쓴 ‘장발장’을 읽던 어린 시절, 불쌍한 전과자를 괴롭히는 자베르의 행실에 한숨 쉬었다. 허나 작가는 그를 강으로 뛰어내려 죽게 해 아이를 안심시켰다.

▲ 국회에 해태상이 버티고 선 것, 단지 화마(火魔)를 피하고자 한 의도만은 아닐 것이다.

법난(法亂) 또는 검난(檢亂)이란 이름 붙을만한 우리의 요즘 상황은, 법의 바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법무장관 검찰총장 등이 등장하는 ‘드라마’다. 검객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법은, 인본(人本)을 위한 도구다. 서구의 ‘휴머니즘’을 동아시아는 인본주의라고 번역했다. 사람(人)의 뿌리(本)라는, 속 깊은 이름이다. 法 글자의 뿌리(어원)에 또한 사람이 안겨 있으니, ‘사람 사는 방식’인 법은 사람을 뿌리로 즉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이치다.

동서양이 어찌 다르랴. 그러나 역사 속에서 동서양은 각각 길을 잃었다. ‘레미제라블’의 비참함과 우리의 ‘검객드라마’에서 치매(癡呆)와도 같은 소용돌이에 빠진 인본(휴머니즘)과 법을 새삼 생각한다. 말장난 아니라면, 인본주의는 또 법은 무엇이고 왜 있는가? 인간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의 뜻 사라진 이 ‘전문용어’는 다만 덧없다.

장발장 말마따나, 인간은 법의 노예일까? 인류와 우주에, 영원의 시간에 눈감고 얄팍한 현대의 명분이나 제 조직의 논리만 챙기는 것은 언어로서의 ‘법’의 법도(法道)를 잃은 것이다.

용어는 언어가 바탕이다. 언어는 인간이 바탕이다. 다시 인간을 찾아야 하는 까닭이다. 인문학의 첫걸음이다. 우리 전통 공부의 ‘문자 있는 사람’ ‘글자 속 든 사람’이란 숙어의 뜻이다.

우리 사회, 법을 빌미로 고래심줄 내 세금 먹고사는 이들의 시야(視野)가 경감 자베르와 도찐개찐이라고 걱정하는 것은 기우(杞憂)에 불과할까. 법 만드는 이, 집행하고 재판하는 이, 이 과정 모두를 관장하는 이 등 관련자들의 역량이나 정서(情緖)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인간 아닌, 다른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 빅토르 위고를, 그 경건함을 다시 읽자.

▲ 불 水, 괴수 해태, 갈 去의 모양 담긴 옛 法 글자. (이악의 著 ‘한자정해’)

토/막/새/김

“물은 해태가 차버린 죄인이 빠지는 곳”

그림의 변용(變容) 즉 디자인인 문자(文字 한자)는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뜻의 물리화학적 조작(操作) 또는 변화를 통해 이미지를 확충해 왔다. 레고놀이를 닮았다.

‘法’ 글자에는 사람이 있고, 해태(의 그림)도 있다. 물도 한 요소다. 글자 모양만으로는 물 수(氵, 水와 같은 글자)와 갈 거(去)의 합체인데 어디에 그런 요소들이 다 숨었담?

해태는 ‘해치(獬豸)’라고도 부르는 상상의 괴수(怪獸)다. 죄 지은 자 금방 가려내 물에 차버렸다. 법(집행)의 상징인 해태는 언제인가 그 法 글자에서 사라졌다. 뜻은 그대로 둔 채.

궁궐에 해태 상(像)을 세우는 것은 그 엄정함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광화문, 국회에서도 본다. 풍수지리설을 따라 화마(火魔 불)를 피하고자 하는 장치로도 여긴다.

물은 해태가 차버린 죄인이 빠지는 곳의 이미지다. 또 물 표면의 수평(水平)함을 빌려 ‘치우치지 않는 공정함’을 상징한다는 설명이 붙기도 한다. 갈 거(去) 글자는 사람이 (집의) 문을 나서는 그림이다. 어원이 그렇다는 것이다.

물 해태 사람 이 3개의 그림을 복원해, 역순(逆順)으로 다시 짜본다면 이 해태 설화는 이내 완성된다. 글자는 보이는 것 이상을 담는다. 그림이어서 그렇다.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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