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시민권의 철학적 아버지 '로크'

철학여행까페[42]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8.1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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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의 처형장면

권력자가 위임받은 권력을 위임자의 뜻과 다르게 사용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요즈음 이명박 정부의 촛불 집회 참가자들과 시위자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탄압과 언론 장악시도를 보면서 절로 드는 의문이다.

이미 300년 전에 영국의 철학자 로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럴 경우 권력자는 소환되어야 하고, 권력은 백성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로크가 이 시대 살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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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
로크는 정부의 목적은 개인의 생명, 자유 그리고 재산권의 보호에 있다고 한다. 정부가 만약 이러한 목적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면, 권력의 위임자에 대한 소환을 포함한 시민의 저항은 정당하다. 로크가 이러한 주장을 펼치던 때는 서슬 퍼런 절대 왕정이 지배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그러한 주장을 펴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네덜란드에서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봉건주의와 절대 군주체제에 반대했다. 그는 왕권신수설에 반대하는 이론적 무기로 인민 주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왕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몽테스키외보다 앞서 권력분립과 소환권까지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근대의 민주적 헌법국가에 까지 이르는 발전에 불을 댕긴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그를 인권과 시민권의 철학적 아버지라 부른다. 로크는 바쁜 정치적 삶에도 불구하고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경험론의 이론적 토대를 닦아 영국 근대 경험론의 아버지로 불린다.

로크는 1632년 8월 29일 영국의 남서부의 서머싯 주에 있는 링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대륙에서는 스피노자가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신흥 시민계급에 속했다. 로크가 열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스튜어트 찰스 1세의 왕당파에 대항해 싸웠던 올리버 크롬웰의 의회군의 장교로 가입했다. 의회파와 왕 사이의 전쟁은 외면적으로는 청교도들과 영국 국교 추종자들 간의 종교 전쟁의 모습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절대 군주의 요구에 대항하는 정치적 투쟁이었다.

이 대결에서는 크롬웰의 청교도들이 승리를 했다. 승리의 결과로 1649년 1월 30일에 런던의 화이트홀 팔레스 야드에서 찰스 1세가 사형을 당했다. 로크는 그 당시 17살로 명문 웨스트민스터 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는 학교 창문을 통해 왕의 처형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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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아탄>의 표지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졸업하고 1652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낡은 스콜라 철학 교과과정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실험과학이나 의학 등에 관심을 보였다.

근대화학의 선구자 로버트 보일을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를 통해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을 넓혀 갔다. 옥스퍼드에서 잠시 강사생활을 한 뒤 1665년에 그는 영국 대사의 비서관으로서 당시의 브란덴부르크의 클레베로 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저명한 의학자 토머스 시드넘과 의학에 대해 공동연구를 했다. 그는 이미 옥스퍼드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았고, 1675년에 공식적인 의사 개업 면허를 얻었다. 철학자로서 보다 의사로서의 경력이 로크가 이후 활동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는 1666년에 앤소니 애슬리 쿠퍼(Athony Ashley Cooper) 경을 만났다. 그는 간 종양 제거수술을 통해 애슬리 경의 생명을 구하면서 그의 주치의가 된다. 애슬리 경은 나중에 샤프츠베리 백작이 되는 인물로 휘그당의 대표자였다. 샤프츠베리는 휘그당의 대표자로 그는 보수주의적 토리당에 반대해 왕권의 제한과 개신교적 자유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다.

원래 '휘그'와 '토리'라는 말은 1679년 요크 공작(후의 제임스 2세)을 왕위계승권에서 배제하려는 왕위계승 배제 법안을 둘러싸고 의회 내 찬성파와 반대파 간에 주고 받은 경멸적인 말이었다. 휘그는 스코틀랜드 게일어에서 유래한 ‘말 도둑’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또한 이 말은 비국교도, 반란 등을 내포하기도 해 왕위계승권 배제파에게 적용되었다. 토리는 아일랜드어로 불법적인 가톨릭교도를 뜻했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처음엔 왕권옹호자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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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
로크는 샤프츠베리의 저택에 머물면서 새로운 정치적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샤프츠베리 백작을 만나기 전까지 홉스의 주저인 <레비아탄>의 영향을 받았다. 홉스는 <레비아탄>에서 국가 이전의 ‘자연상태’와 국가적으로 조직된 상태를 구분했다.

자연 상태는 계약이라는 합의를 통해 국가로 이행하는데, 이 계약이라는 합의는 자유와 평등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로크는 홉스가 근대철학에 도입하였던 계약이론의 추종자였다. 계약이론에 의해 뒷받침된 주장, 즉 정치적 지배의 정당성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서 도출된다는 주장은 그의 신념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초기 에세이들에서 강력한 국가권력을 옹호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절대주의적 왕권의 편에 서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로크의 입장은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면서부터 변화한다. 샤프츠베리는 로크를 자신의 주치의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 중의 한 사람으로 삼았다. 로크는 그를 통해 보수적인 토리당에서 자유주의적인 휘그당으로, 대학 강사에서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 그리고 뛰어난 철학자가 되었다.

샤프츠베리는 로크에게 정치적 직위와 학문적 영예를 주선해 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로크는 로얄 소사이어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샤프츠베리의 런던 저택에서는 영국의 최고 엘리트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로크는 여기에서 학문적 실험을 수행했고, 정치적 철학적 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를 감싸고 있던 이러한 고무적인 지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그의 저서 중 많은 것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로크는 샤프츠베리를 통해 영국 정치에 있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함께 관여하였다. 그의 후원 아래 한 때 국가서기관으로 일을 했고, 국가서기관으로서 영국의 식민지의 건설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주자가 식민지에 처음 도착해서 정치적 제도를 성립시키고 헌법 가결을 할 때까지의 이러한 과정은 새로운 국가의 성립과 비교할 수 있으며 자연계약론에서 자연 상태에서 국가적 상태로의 이행과도 비교할 수 있다. 그는 캐롤라이나 정부를 위한 기본적 헌법을 기초하는 일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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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2세
그러나 그 당시 영국의 정치적 상황은 로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1660년에 다시 왕정에 복귀한 스튜어트왕 찰스 2세는 영국 국교나 가톨릭주의에 추파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인 가톨릭교도 제임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샤프츠베리를 둘러 싼 휘그당들과 영국 대중 대부분은 이런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들은 가톨릭과 교황에 반대하는 정치를 수행했다. 휘그당들은 찰스 2세의 권력 정당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로크는 휘그당들의 견해를 이론화했고, 그에 대해 철학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관용론>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권력은 사회적 행복과 만인의 평화를 위한 목적을 지닌 것으로 왕에게 독점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의회를 자의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월권을 행사하는 가톨릭 왕은 공공의 평화를 파괴하고, 아마도 더 나아가 내전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왕은 정당성을 결여했다고 주장한다.

“만인의 행복이 권력의 목적”

토리당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존 필머(John Filmer)는 1680년 자신의 책 <족장론>(Patriarcha)을 발간했다. 그 속에서 왕권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었던 부계적 권력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가부장제’에 그 뿌리가 있다. 정치권력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것의 권한은 무제한이다. 아담은 정치권력을 그의 후손에게 넘겨주었다. 군주들은 바로 그들에게 속한다. 국가는 왕이 정점에 있는, 가족 보다 더 커다란 조직형태이다. 국가의 신하는 가족의 구성원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왕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 필머의 저서는 토리당들 사이에서 아주 높은 대중적 인기를 끌며 휘그당들에 맞서는 이론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존 로크는 필머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통치론>을 집필한다. 이 책은필머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혁명의 정당화도 포함한다.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왕권의 전복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왕권전복은 1682년에 샤프츠베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실제적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위한 계획이 발각되자 샤프츠베리는 개신교 목사로 위장하고 네덜란드로 도주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그는 몇 달이 지난 후 죽었다.

로크를 포함한 샤프츠베리의 추종자들도 왕의 복수를 두려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더 이상 <통치론>의 출간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683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으로 망명을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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