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존인비(車尊人卑)’ 한국 사회

한영인 문학평론가l승인2020.11.27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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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유모차에 두 아이를 태우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30대 여성이 트럭에 치여 세살 난 딸과 함께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참변을 보도하는 기사들은 거의 한목소리로 사고 장소가 스쿨존이었음에도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고 영상을 보면 신호등의 설치 여부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다.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그 어떤 차도 유모차와 함께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고립된 이 여성을 위해 잠시 멈춰 기다려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횡단보도는 차량의 원활한 흐름을 가로막는 성가신 것이며 도로에서는 언제나 보행자보다 차가 우선권을 가진다는 생각, 혹은 자동차는 오직 신호등의 빨간불 앞에서만 (억지로, 겨우) 멈춰 설 뿐 그외의 상황에서는 결코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다는 단단한 결의 같은 것들이 우리의 도로를 점령한 지 오래되었다. 사고 영상 속의 풍경은 너무나 익숙해서 만약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우리로서는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다.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거꾸로 생각해보라. 만약 그 순간 어느 차 한대가 갑자기 멈춰 서서 유모차를 끄는 여성이 천천히 지나갈 수 있게 기다려주는 풍경을. 이건 드라마나 자동차 보험회사 CF 같은 데서나 나올 법한 장면인지 모른다.(물론 그 차가 뒤차로부터 받아야 하는 짜증스러운 경적 소리는 오로지 그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2018년 기준 횡단보도에서 사고를 당한 보행자는 무려 1만 3416명이고 그중 목숨을 잃은 사람도 344명에 달한다. 중상을 당해 일상생활에 현격한 지장을 받는 경우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모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신호등의 설치 여부가 아니라 오직 신호등의 신호밖에 읽지 않으려고 하는 운전자들의 관성이 아닐까? 하지만 신호등은 차가 언제 서고 다시 출발해줄지에 대해서만 알려줄 뿐이다. 차량이 보행자에게 얼마나 거대하고 위협적인 ‘흉기’로 다가오는지를 성찰하고 보행자를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적극적인 배려의 문화가 자리 잡지 않는다면 아무리 신호등을 많이 설치해도 참변은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차 높이고 사람 낮추는 우리 사회

한때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입을 맞춘 듯 하던 말이 있다. 선진국인 줄 알았던 유럽의 시민의식이 생각보다 형편없다는 것인데 이유를 물으면 그곳 사람들은 무단횡단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단횡단하는 시민들의 무질서함은 반대로 그 사회가 이룩한 어떤 신뢰의 측면도 있어 보인다. 내가 신호등의 신호를 무시하거나 횡단보도를 통해 길을 건너지 않아도 마주 오는 차가 자신을 쳐 죽이지 않을 거라는, 우리로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신뢰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와 같은 사회적 신뢰는 그 신뢰를 형성하는 제도적 기반에 의지한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무단횡단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처럼 횡단보도 밖에서 건너는 모든 행위를 무단횡단으로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행자는 차량의 흐름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이거나 자칫 차에 잘못 부딪혀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잠재적 위험요소’에 가깝다. 보행자를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똥’ 정도로 여기는 태도는 이른바 ‘민식이법’의 통과를 둘러싸고 나타났던 운전자들의 거대한 불만과 분노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당시 운전자들은 어떻게 하면 주의 깊게 살펴서 어린 보행자의 안전을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충분한 주의만 기울인다면 자신에게 거의 닥칠 일도 없는 상황을 가정해서 이 법을 악법으로 몰아붙이기에 바빴다. 더불어 ‘민식이법’이 ‘성추행 사건들처럼’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할 거라며 성토함으로써 아직까지 한국의 운전자는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도로는 모두가 사용하는 공공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 위의 위험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참극이 보여주는 것처럼 여성과 영·유아, 노약자들은 도로 위에서 자신의 취약함을 더욱 쉽게 노출한다. 이런 취약성을 보완하고자 마련된 법에 대한 많은 운전자들의 분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운전자들의 법감정을 일신할 수 있는 새로운 운전문화의 확립이 긴요함을 일러주지만 이를 위한 사회적인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열악한 일터에서 일하다 사망하는 노동자의 비극에 충분히 분노하는 사람들도 운전대를 잡은 자신의 책임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어떠한 조치 앞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민식이법’이야말로 개별 운전자 차원에 적용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다. 산재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책임을 무겁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도로 위에서 자신의 책임을 강하게 묻는 법안에 대해 반대하는 이런 태도는 확실히 모순적이다. 하지만 ‘나’를 쏙 빼놓고 ‘남’만 욕하는 속 편한 태도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미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도로에 관한 새 사회계약 필요

한국의 운전문화는 근대화 과정에서 생성된 특유의 목적 지향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문화와 뗄 수 없다. 경부고속도로로 대표되는 도로와 그 위를 질주할 자동차의 생산은 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장면이거니와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자신의 속도를 방해하는 외부 요소들에 대한 신경질과 짜증은 추격자로서 한국인이 가진 조바심 및 초조함과 맞닿아 있어 보인다. ‘저녁이 있는 삶’이나 ‘주 52시간 노동제’ 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이 기존의 목표 지향적이고 성과 지향적인 삶의 속도를 재조정하려는 사회적 실험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이제까지 차량에 우선권을 주었던 도로 사용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긴급하게 추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로를 쇠로 만들어진 자동차가 질주하는 소외된 공간이 아니라 약한 다리와 작은 몸피, 느린 걸음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이뤄낼 수 있을까. 그 전환을 바탕으로 우리는 도로의 사용에 대한 일종의 새로운 사회계약에 합의할 수 있을까. 그건 근대성과 남성성의 결합을 해체하고 도로와 사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하는 시야의 획득을 요구하는 것이니만큼 단기간에 이뤄낼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체념하거나 방관하기엔 잊을 만하면 전해지는 비보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너무나 무참하게 만든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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