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龍)에 관한 큰 오해

신년, 도끼질 어설프면 나무도 상하고 땔감도 버려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l승인2021.02.10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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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용(龍)의 멱살을 잡고 시작하자.

용이 음주운전하다 적발됐다.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 얘기, 추락한 용의 그 자리를 정우성이 채운다고 시끌벅적하다. 용도 지렁이도 음주운전은 안 된다. 대리 쓰라. ‘이제 개천에서 용 안 난다’는 신문 기사는 느끼하다. 가난한 집이 ‘개천’이라는 자본주의적 표현도 천박하다.

▲ 큰 나라 섬기느라 임금은 용의 이미지를 못 썼지만, 백성들은 별 상관없었다. 인생 전반에서 용은 우리와 가까웠다. 조선시대 철화(鐵畵) 백자의 구름 속 나는 용은 해학(諧謔)과 함께 나름의 위엄을 자아낸다. (시카고미술관 소장)

용은 하늘을 쥐락펴락한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의 터전)이다. 인내천(人乃天)의 섭리 아래, 용은 도구다. 하늘인 사람을 위한, 사람의 상상이 빚은 동아시아 최고의 창조물이다. 용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도도하고 의연(毅然)하고 호방(豪放)해서다.

바이러스 따위에 시달려 못난 몰골 다 드러내지만, 5천여 년 인류문명사 톺아보면 인간은 대단하다. 그 대단한 내역을 저 병마가 역설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인가. 돈이나 학문이나 미사일이나 핵발전소나, 우리가 쥐락펴락해야 할 저 도구들이 되레 우리 멱살을 쥐고 있다.

정색하고 용의 멱살을 쥐어야 할 때 아닌지. 우선 용에 대해 잘 못 알았던 여러 가지 주제 중에서 셋만 챙겨보자.

첫째, 미르 즉 용은 드래곤이 아니다. 둘째, 용은 개천에서 나지 않는다. 셋째 용은 과외수업 따위로 키워낼 수는 없다.

‘용팔이’는 용과 파리(fly)의 합성이다. 드래곤플라이는 ‘잠자리’다. 서양문물 들어와 생긴 시장판 왈패풍속의 저속한 이름이다. 드래곤을 용이라 함은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 눈감은 결과다. 어찌 동양은 저 찌질한 3류와 용을 같은 것으로 여겼을까, 서양물이 그리도 좋았을까?

미리내는 미르(용)가 사는 내(川)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의 계기리라. 허나 비유법이다. 또는 좀 못사는 집도 포함한, 눈빛 맑은 소년들을 격하게 응원하는 배려다. 서양말 ‘소년들아, 야망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와 비슷한 무게감을 갖는다.

용은 개골창에서 안 산다. ‘돈’과는 상관없다. 흑산도 바다나 지리산 천왕봉처럼 용이 날 만한, ‘대처(大處)’에서 산다. 우리 겨레는 하늘의 미리내를 내내 용의 터전으로 여겼다.

이는 젖(乳)의 길이란 뜻의 서양신화 관련 이름 ‘밀키웨이’와 발상의 애초가 다르다. 천문학적 은하(galaxy 갤럭시)는 최소 수십만 광년(光年) 길이(徑 경)의 규모다. 우리 겨레가 쩨쩨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다.

말(언어)은 사물의 본질을 품어 간직하고 발효시켜 후세에까지 널리 뿜어내는 인류의 지혜다. 용천(龍川) 즉 미리내, 과연 용이 살만한 크기를 이르는 말 아닌가.

하나(1)를 들으면 열(10)을 깨친다. 총명(聰明)함의 오래된, 상징적 표현이다. 말귀와 글눈이 밝은 것이 총명이다. 복제(複製)와 표절(剽竊)이 세상사는 ‘좋은 방법’이 된 이 현실을 노려보자. 심지어는 우리의 마지막 기둥인 아이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가르친다.

목을 놓아 통곡(痛哭)해야 할 때 아닌가. 세상의 어떤 부모와 선생이, 몰랐거나 다른 방도가 없었더라도, 베끼고 훔쳐서 ‘쉽게 가라’고 가르치는가. 말 못 알아듣고, 글의 뜻 모르는 2세를 과외로 쪽 집어 바보를 만든다. 바보들이 주고받은 저 눈빛이 어찌 용을 이루랴,

설민석 스타일의 오락형 강연이 난무(亂舞)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강연 산업은 이미 (썩은 냄새 풍기는) 거대 시장이 되었다. 시민의 눈과 지성이 매섭지 못한 틈을 파고들었다.

총명의 시발점은 또렷한 언어다. 흐릿한 말과 글은 총명을 흐린다. 남의 말글 빌리는 요령이 공부의 불가피(不可避)한 줄기가 됐다. 괴물 같은 과외수업도 이 상황의 연장선 위에 있다. 용의 음주운전도, 설민석 현상도 그 혐의 벗기 어렵다.

본 듯한, 들었던 것 같기도 한, 흐리멍덩한 개념으로 철학과 문학과 언론을 하고 물리학과 의학을 한다. 그 열매는 충실할까? 글을 읽고 짓지 못하는 우리의 빈한한 문화현실, 생각을 차단하고 왜곡된 의식(意識)과 행동을 부른다. 새삼 (책임을) 묻는다. 이대로 가도 되는지.

토/막/새/김

新, 새로움이니 멈추지 말라

새해 신년(新年)의 新은 도끼(斤 근)로 나뭇가지를 찍어내는 그림이다. 땔나무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본다. 나무의 성장에 지장을 주는 비뚤어진 가지나 잔가지를 쳐내는 작업이다.

도끼질이 어설프면 나무도 상하고 땔감도 못 얻는다. 세상일도 같다. 어려운 시기에 부합하는 새로운 방책(方策)은 당연히 과감해야 한다. 깊은 사고(思考) 끝에 바르게 판단했다면, 늘 과감하게 실천하는 게 옳다. 새로워지는 방법이자, 새로움의 뜻이다. 멈추니 바이러스가 왔다.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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