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철학여행까페[51]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10.2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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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칸트는 한 남루한 청년의 방문을 받았다. 이 청년은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칸트를 매우 존경하여 바르샤바를 떠나 쾨니히스베르크의 칸트를 방문했다. 조용한 성품의 칸트가 이 청년이 하는 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낸 것을 보면 이 청년이 앞뒤 가리지 못하는 성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매우 열정적인 성품의 이 청년은 요한 고트리브 피히테였다. 피히테는 독일관념론의 정초자이다.

이동희
피히테의 초상
독일관념론의 피히테


피히테는 칸트를 만나기 전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견뎌 나갔다. 그런 가운데 그는 칸트철학을 알게 되어 그것을 행복이자 삶의 위안으로 삼았다.

피히테가 칸트철학을 알게 된 까닭은 한 학생이 칸트 철학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칸트는 라이프치히에 살던 한 학생의 요청을 받아 들여 칸트를 연구했는데, 칸트를 연구하고 칸트로부터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나는 아주 원대한 계획을 품고 취리히를 떠났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그 모든 희망은 좌절되어 버렸고, 나는 거의 자포자기에 빠져 버렸다. 나는 절망 속에 칸트 철학에 몰두했다… 그의 철학은 마음을 고양시키는 하면 지독한 두통거리이기도 했다. 나는 칸트철학에서 마음과 몸 모두를 가득 채우는 작업을 발견한 셈이었다. 나의 광포한, 길길이 뛰던 정신은 잠잠해 졌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체험해 온 나의 삶 가운데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빵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뛰어 다녀야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아마도 이 넓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전기를 마련해 준 칸트를 만나기로 하고 가정교사로 돈을 모은 다음 쾨니히스베르크로 떠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열정적인 성품으로 인해 칸트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환대를 받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칸트를 만났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이 떨어져 궁핍한 처지가 되었다. 그는 궁핍한 처지에서도 여관에 틀어 박혀 35일간 떠나지 않고 칸트철학 원리에 충실한 종교철학에 관한 포괄적인 논문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칸트에게 보냈다. 칸트는 피히테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피히테에게 그 원고를 출판할 수 있도록 출판업자를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이 출판업자는 이 원고를 출판하면서 실수로 저자의 이름을 빼놓았다. 익명으로 이 책이 출판되자 사람들은 노년의 칸트가 그 책을 썼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 책이 칸트의 네 번째 비판서인 것으로 오해하고 갈채를 보냈다.

첫 책은 칸트작으로 오해

칸트는 이 책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해야 했다. 칸트의 해명으로 그 책의 저자가 피히테라는 것을 밝혀졌을 때, 사람들은 피히테를 칸트와 같은 철학자로 대우하기 시작하였다. 초라한 무명의 철학자가 일약 스타가 되어 예나 대학 교수로 전격적으로 초빙된다. 예나 대학에서 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동희
연설하는 피히테

1793년 예나대학교에 철학교수로 취직한 피히테는 강의 이외에도 이 시기에 아주 중요한 철학 저작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출판된 저작으로는 강의록인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가지 강의〉(1794)와 피히테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수정하고 가다듬은 지식학에 관한 저작인 <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자연법의 기초 Grundlage des Naturrechts nach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6), 그리고 의무 개념에 기초한 그의 도덕 철학 저작인〈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인륜이론의 체계 Das System der Sittenlehre nach den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8) 등이 있다.

예나 대학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그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은 프랑스혁명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감격한 나머지 프랑스 시민권을 얻으려고 까지 했다. 결국 거기까지 이르지는 못했어도 그는 1793년에 두개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하나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공공의 판단교정을 위한 기고문>과 다른 하나는 <유럽의 영주들에게 그들이 이제까지 탄압했던 사상의 자유에 대한 반환을 청구하다>라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들을 통해 피히테는 더 이상 철학이 ‘자기 자신의 내면’만 파고 들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들’ 즉 사회적 변혁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들 속에서 피히테는 그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기존의 사회질서가 민중에 불만족한 것이라면 민중은 그것을 폭력적으로 변혁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민중은 가능성 뿐만 아니라 더 나가 혁명을 초래할 의무조차 가지고 있다.”

예나대학에서 피히테는 중요한 저작들과 논문들 저술했지만 그의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학생들과 불화가 잦았다. 그는 눈꼴사납게 방자한 학생단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오늘날과 다르게 당시 학생들은 귀족이나 돈 많은 가문의 자제가 많았고, 그들의 돈으로 먹고사는 교수를 우습게 보기도 하였다. 피히테는 이런 학생들에 대해 “그들은 뛰어난 검투사로서의 공적 이외에는 아무런 공적도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였다.

학생들은 피히테의 비판에 반발해서 강의시간에 소동을 피우기도 했고, 피히테의 부인을 대로상에서 모욕하기도 했다. 돌멩이를 던져 피히테 교수의 창문을 박살내기도 하였다. 동료 교수들은 학생들의 무례함을 탓하기보다 피히테가 학생들에게 잘못했다고 비방하였다.

피히테는 학생들의 무례함과 동료들의 비방에 분노해 교수직을 그만 둘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피히테가 정작 예나 대학을 떠나게 된 사건은 다른 데서 시작되었다. 그 사건은 이른바 무신론 논쟁이라는 사건이었다.

“민중은 혁명의 의무를 진다”

1798년 피히테의 제자이자 지인인 젊은 철학자 F. K. 포르베르크가 피히테에게 종교 관념의 발전에 관한 글 한 편을 보냈다. 이 글을 인쇄하기 전 피히테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 믿음의 근거에 관하여>라는 짧은 서문을 썼다.

이 서문에서 그는 신은 세계의 도덕적 질서이고 모든 인간 존재의 기초인 영원한 정의 법칙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 무신론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프로이센을 제외한 독일의 모든 주들이 추종하는 작센의 선제후 정부는 피히테가 공동편집자로 있는 ‘철학 잡지’의 출판을 금지했고, 피히테의 추방을 요구했다. 피히테는 오히려 2개의 변호문을 출판한 후 징계가 내릴 경우 사직하겠다고 작센지방의 교육부를 협박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그 위협을 사직하겠다는 제의로 받아들여져 피히테를 예나대학에서 추방하였다.<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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