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볶으며 운동을

[시민운동 2.0] 최재훈l승인2009.03.1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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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제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후배와 같이 자그마한 커피 가게를 열었거든요. 초록색의 커피 생두를 들여다가 직접 볶아서 팔기도 하고 음료로 만들어서 내놓기도 하는 곳인데, 쉽게 말하자면 방앗간과 떡집을 합친 거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난생 처음 하는 장사라 아직 서툴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설렘과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가 꽤 쏠쏠하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는 경기 침체의 한파를 발가벗은 채로 고스란히 견디며 버티고 선 듯한 짜릿함(?)도 함께 즐기면서 말이지요.

이런 저의 변신을 접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 또한 재미있습니다. 멋지다며 부러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 나라에서 이른바 운동이란 걸 하면서 먹고 산다는 게 오죽 힘들었으면 쟤가 장사에 뛰어들 생각을 다 했을까 하고 측은해하면서 혀를 차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얼마 전 만난 한 친구는(역시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녀석입니다) 제게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더군요. MB 정권의 독재와 퇴행적인 작태에 맞서 싸우자면 다들 하던 생업도 접고 운동에 뛰어들어도 모자랄 판에 비겁하게 ‘전선’에서 이탈했다고 말입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그 자리에서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 이해받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 녀석도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쏟아 부은 거겠지 싶어 그냥 허허 웃고 말았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녀석의 혀가 이미 심하게 꼬부라져 있기도 했었구요.

운동은 꼭 전선에서?

물론 제가 운동 바닥에 몸담은 지 십여 년 만에 커피장사를 시작하게 된 데는 경제적인 동기를 절대 무시 못 하는 게 사실입니다. 먹고 산다는 거, 남들보다 더 벌고 더 쓰겠다는 건 아닐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자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세는 활동가에게도 꼭 필요하니까요.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과거 잠깐 동안 해외에 머물면서 느꼈던 깨달음을, 아니 오래 전부터 운동을 하면서 품어 왔던 작은 목표를 실행에 옮기고픈 욕심이 지금의 선택으로 이끈 거지요.

벌써 2년 전인가요. 캐나다의 밴쿠버라는 도시에서 지역 반전운동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당시였습니다. 하루는 토마스라는 친구가 “한국에 있을 때는 무슨 일을 했었어?”하고 물어 왔습니다. “응,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 단체에서 운동을 했지.” “그건 아는데, 직업이 뭐였냐구.” “그게 내 직업이었어.”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토마스는 “다른 일은 안하고 운동만 했다구?”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겁니다. 그 뒤로 다른 친구들과도 이런 대화를 여러 차례 되풀이해야 했고, 그들이 보인 반응 역시도 토마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각종 사회단체에서 전업으로 일하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한국의 사회단체 활동가를 바라보는 인식과는 다소 차이가 납니다. 한국에서는 전업 활동가란 게 ‘직업’보다는 ‘운동’에 더 무게 중심이 실린다면, 그 나라에서는 ‘보수는 낮지만 보람 있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더 강한 편이지요. 그 대신 평생 ‘운동’을 하겠다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 따로 ‘직업’을 갖고 계시더군요.

제가 활동하던 단체의 멤버들도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빼고는 다들 용접공, TV 케이블 수리공, 시 공무원, 부두 노동자, 사진사 등의 직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같이 활동하는 한 대학생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노아, 넌 곧 졸업인데,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생각이야?” “아직 확실치는 않은데, 버스 운전을 할까 생각 중이야.” “엥? 웬 버스 운전?” “지역 주민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사회 문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우리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생길 거고, 좋잖아.” 그 뒤 실제로 노아는 버스 회사에 취직을 했고, 무용을 전공하는 제닌과 사회학을 전공하던 키라는 전기와 용접일을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을 했답니다.

캐나다에서의 경험

그 날의 경험들은 제게 커다란 충격과 깨달음을 줬습니다. ‘운동’과 ‘생업’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먹기 따라서는 얼마든지 병행이 가능한 거구나 하는 깨달음 말이지요. 물론 캐나다와 한국 두 나라의 사회적인 환경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한 쪽의 경우를 곧바로 다른 한 쪽에 대입시킬 수는 없다는 건 잘 압니다. 또한 매일같이 야근이니 잔업이니 하면서 밤 열시가 넘어서 퇴근을 해도 항상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해하는 우리네 노동자들의 현실, 일년 내내 쉬는 날 하루 없이 일해도 가게 임대료 내기가 벅찬 한국 자영업자들의 현실도 잘 알구요.

집회, 기자회견, 성명서 작성, 회원 사업 등 온 몸이 부서져라 활동해도 늘 사람 한 명이 아쉬운 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처지는 구태여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저와 같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낮에는 열심히 커피를 팔고, 저녁에는 단체 사무실로 돌아가 모임을 갖고, 집회를 준비하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꿈꾸고, 그 밑그림을 그려보는 사람 말입니다.

흔히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그런 식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저 같은 사람은 ‘시민’이자 곧 ‘활동가’인 셈이니, 저 같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적어도 ‘시민 없는 시민운동’ 때문에 고민할 일은 없어지겠지요. 이게 바로 제 나름의 좀 더 길게, 좀 더 다양하게, 그리고 좀 더 즐겁게 운동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방식이랍니다. 어때요, 저의 새로운 시작에, 그리고 여러분들의 나날이 진보하는 삶에 건투를 빕니다!


최재훈 ‘경계를 넘어’ 회원·커피공방 아저씨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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