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은 감성이다

철학여행까페[65]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3.3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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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포이어바하.
포이어바하는 철학의 비판에로 향한다. 1842년에 썼지만 검열에 의한 집필 금지로 1843년에 출간된 <철학 개혁을 위한 잠정적 테제들>에서 그는 사변적-관념론적 철학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이듬해에 출간된 <미래 철학의 원리들>에서 헤겔의 사변철학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포이어바하는 젊은 시절 헤겔의 관념론적 철학에 사로 잡혀 보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헤겔 철학과 결별한다. 그가 볼 때 모든 세계의 실재를 지배하는 헤겔의 절대 정신이란 것도 역시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신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과 신학이 본래적인 세계라고 주장하는 내세, 절대 세계, 이데아의 세계, 신의 세계가 “환상적인 허깨비”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러한 세계를 추구하는 사변 철학을 “술 취한 철학”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술 취한 철학

그는 헤겔류의 사변 철학과 모든 초감각적인 것을 뒤집어 버리고자 한다. 뒤집어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것에서 ‘새로운 철학’을 출발시키고자 한다. “새로운 철학”은 이제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출발해야 한다.

그 인간은 이성만 가진 인간이 아니라 ‘머리’와 ‘심장’을 가진 전체로서의 인간이다. 포이어바하는 인간의 본질을 이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느끼고 감각하는 감성에서 찾는다. 이성은 실재를 뛰어 넘어 지나치게 사변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감성은 감각 지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현실을 매개해 준다. 그러므로 포이어바하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 현실, 감각은 동일하다.”

그러나 감각은 주관적이고, 많은 경우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가? 포이어바하는 그러한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에게는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상대방’과 더불어 주어지기 때문에-그 상대방에게서 인간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지각을 검증할 수 있다-감각적인 것의 현실성을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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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의 가을

포이어바하는 종교비판을 통해 신에게서 인간으로, 철학 비판을 통해 초감성적인 것에서 감성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모든 초감성적인 것의 포기는 그를 무신론자로, 감성적인 것인 것의 추구는 그를 유물론자로 만들었다.

포이어바하는 유물론을 통해 헤겔 철학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이러한 포이어바하의 유물론은 급진적인 청년 사상가들인 맑스나 엥겔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철학을 하려면 불의 시내(포이어 바하Feuerbach의 이름 뜻)를 건너야 하다고 떠들고 다닐 정도였다.

포이어바하가 이렇게 대담하게 기존의 종교와 철학에 대항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던 시기는 혁명의 시기였다. 178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분위기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다. 1848년 2월 다시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은 독일에까지 급속하게 영향을 미쳤다. 1848년 혁명은 오스트리아 빈 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전 유럽적인 반항운동이었다.

독일은 그해 3월에 혁명이 일어났다. 3월 혁명은 독일에 더 많은 자유와 35개국의 소국가로 갈라 진 통일에 대한 요구였다. 포이어바하는 처음에는 이 혁명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몰지각한 자들에 의한 실현 불가능한 거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혁명의 여파가 커지고,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자 이러한 혁명에 적극 동조했다.

“국가의 용무를 특권 계층이나 특권 계급의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 민족의 문제로 만들려는 정신은 승리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의 승리와 더불어 인류의 과제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시대정신 대변자 포이어바하

시대가 변하자 하이델베르크 대학생들은 “새로운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한 사람으로서 포이어바하를 강의에 초빙한다. 그러나 대학 당국은 무신론자인 포이어바하에 반대해 강의실을 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시청에서 학생과 노동자를 상대로 ‘종교의 본질’에 대해 강의했다. 포이어바하의 강의방식은 서툴렀지만 사람들은 그의 철학적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포이어바하는 대중 앞에 나서 강연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그는 교수생활에도 별로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는 다시 조용하게 연구를 진행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48년 독일 시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포이어바하는 좌절과 실망감을 안고 부르크베르크 성으로 돌아 왔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이주하기 위한 돈이 충분치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혁명 반대 세력들이 활개를 치고, 포이어바하가 쓴 문장까지 도용당해 조롱을 당했다. 포이어바하는 “인간이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가 먹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것을 몰레쇼트는 ‘백성을 위한 음식의 이론’이라는 제목에서 희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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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한스 멤링 작
정치적 상황 탓도 있지만 포이어바하의 생활도 점차 궁핍해 갔다. 도자기 공장의 수입이 떨어져 1859년에 결국 공장은 파산을 선고하고 문들 닫을 수밖에 없었다. 공장에 돈을 투자한 포이어바하는 재산을 모두 잃었고, 거처했던 성도 처분한 채 ‘소음의 시궁창’이라 할 뉘른베르크 근교의 조그만 집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는 밖에서 떠드는 어린아이들의 소리, 개 짖는 소리, 거리에서 나는 소리에 시달려 제대로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중요한 논문인 <특히 자유의지와 관련해서 본 유심론과 유물론>을 집필하기도 했다. 1862년부터 그는 실러재단에서 주는 정기적 지원금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해 갔다. 다시 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이 그를 방문했다.

이제 포이어바하는 1866년 벌어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간의 독일 전쟁으로 정치적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정책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통일정책이 폭력에 의지한 것이고, 또한 어떠한 자유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1866년 맑스가 쓴 자본론 1권을 연구했고, 그 해에 미국에서 벌어 진 여성운동에 매우 고무되었다. 1867년에 그는 가벼운 뇌졸중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나 포이어바하는 말년에도 정치적 활동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미국 이민 꿈꾸기도

1869년 그는 리브크네흐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만든 사회 민주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을 가로 막는 것은 그의 궁핍한 생활과 건강이었다. 사회민주당 계열의 한 신문이 궁핍한 철학자 포이어바하를 위한 모금에 나섰고, 다른 신문들도 그러한 기사를 보고 독자들에게 모금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모금은 포이어바하가 걱정했던 부인과 딸이 검소하게만 산다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충분하게 걷혔다.

포이어바하는 이후 여러 차례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거의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그는 1872년 9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뉘른베르크 요한니스묘지에 안장되었고, 수많은 사람들과 시민단체들 그리고 사회민주당 인사들이 그의 장례식에 함께 했다.

포이어바하의 철학은 한 마디로 피가 흐르고, 세상을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실의 구체적 인간을 대상으로 했다. 인간을 추상화하고, 현실을 호도하는 종교와 철학을 포기할 때 비로소 인간이 보인다고 그는 주장한다.

“인간이 기독교를 포기할 때, 비로소 그는 인간이 된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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