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황소대가리’-칼 맑스

철학여행까페[66]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4.0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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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 저 깊숙한 곳에/네 영혼의 눈은 갈수록 맑아지네.
내 어렴풋이 그려오던 것/마침내 당신에게서 찾았구려.
저 거친 삶의 가시밭길 속에서/내 끝내 다스리지 못했던 것.
당신의 황홀한 눈길과 함께/까닭없이 내게로 다가왔네.’


이동희
맑스
맑스의 달콤한 연애시


누가 이 달콤하고도 낭만적인 시를 쓴 사람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철학자 칼 맑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시는 맑스가 젊었을 때, 자기 누나의 친구이자 자기보다 나이가 몇 살 연상인 약혼녀 예니에게 바치는 시다.

맑스는 원래 시인이 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 되지 않고 세계사에 누구보다 커다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가 되었다. 철학사를 보면, 시인이 되려고 하다가 방향을 틀어 위대한 철학자 된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이 그랬듯이 칼 맑스도 시인적 재능과 문학적 열정을 그가 쓴 여러 가지 책 속에서 날카로운 비유와 풍자로 녹여 넣었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주장했던 무신론자 칼 맑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한 랍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쪽도 랍비이었다. 그는 당시 프로이센의 라인 주에 속했던 주교도시 트리어에서 1818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맑스는 유대인이었지만 종교에 대해서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칼 맑스가 태어나기 직전에 유대교를 포기하고 루터 신앙을 받아 들였다. 그가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이유는 당시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던 갖가지 불이익과 차별 때문이었다.

아버지 맑스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1834년 1월 18일 라인 주 의회 의원들의 한 향연에 참석해 대의제를 지지하는 연설을 행한 후로 프러시아 경찰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이동희
트리어의 맑스 생가
맑스의 집안은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랍비 집안이었다. 랍비들은 집중적인 텍스트 해석을 받고 논리적 훈련을 받는다. 칼 맑스의 타고 난 논리적 날카로움은 이런 집안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인류가 어느 날 고난의 상태에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메시아적 사상도 칼 맑스의 철학 속에 ‘공산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칼 맑스의 아버지는 셋째 아들 칼 맑스에게 상당한 희망과 기대를 가졌다.

“신의 뜻이 허락하는 한, 너 자신과 너의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만일 내 추측이 들어 맞는다면, 인류의 이익을 위해 네가 살아가야 할 날은 전도양양하다.”

유대교 랍비 집안 태생

아버지는 ‘인류의 이익을 위해’ 맑스를 유능한 법학자로 교육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아들을 본 대학으로 보냈다. 맑스는 1835년 본 대학에 입학해 처음에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서 법학 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아버지가 걱정을 할 정도로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문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그는 법학 공부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호메로스 그리고 현대 예술사 등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시우회에 가입해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본 대학에서 맑스의 생활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맑스는 넘치는 열정으로 여러 방면의 공부를 하고, 학생 활동에도 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고성 방가 및 음주 및 야간 안면 방해’로 학생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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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부인 예니.
아버지는 맑스를 당시 법학에서 권위가 높았던 베를린 대학으로 보내고자 하였다. 맑스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1836년에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에 여름방학을 트리어에 있는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가 트리어로 온 것은 어릴 적 친구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 때문이었다. 예니는 추밀고문관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의 딸로 귀족집안 출신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로 무도회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고, 게다가 뛰어난 두뇌와 덕성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맑스가 쓴 많은 글들을 읽고 교정을 할 정도였고, 맑스의 대책 없는 궁핍한 경제생활의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836년 장래를 함께 하기로 하고 약혼을 했다. 그러나 이 결혼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예니의 집안에서는 평민이자 무일푼의 청년에게 딸을 맡기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맑스의 아버지도 공부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맑스가 “시적인 감흥으로 사랑에 흥분하고 도취해서” 약혼을 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약혼을 했고, 7년간의 기다림 끝에 결혼을 했다.

맑스는 이 사이에 베를린 대학 법과 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훗날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때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법학 공부에 몰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베를린에 도착한 이후부터 저는 지금까지 맺고 있던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습니다. 여간해서는 남을 방문하지도 않았고, 한다고 해야 마지못한 방문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학문과 예술에 내 온 몸을 투신하고자 했습니다.”

맑스는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특히 헤겔의 제자였던 에두아르트 간스 교수의 법률학 강의를 선택해 들었고, 이 교수에게서 ‘매우 부지런한’ 학생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는 강의를 듣고 공부하는 틈틈이 시를 썼다. 예니에게 바치는 세 권의 소네트와 풍자시, 연애시와 정치시 등 여러 편의 시를 썼다.

이동희
청년 맑스
법학대신 철학을 선택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법철학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철학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그는 철학과 역사학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점점 더 법률학과 멀어지고 철학을 전공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맑스는 베를린에서 청년 헤겔학파를 알게 되었고, 종교적 철학적 도그마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정치적 신념, 양심과 출판의 자유 등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게 된다. 이제 맑스는 청년 헤겔학도의 모임인 ‘박사 클럽’의 주요한 회원이 되어 그곳에서 밤낮없이 토론을 하며 주도적인 인물이 되어 간다. 동료들은 해박한 지식으로 토론에 열정적인 그를 ‘사상의 창고’, ‘이념의 황소대가리’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이런 칼 맑스의 모습을 못마땅했다. 그는 실망에 차서 이런 편지를 보내 아들을 나무랐다.

“무질서하고 학문의 모든 분야를 어정쩡하게 이리 저리 기웃하면서 침침한 석유 등잔 아래서 모호한 야심을 품고, 맥주 때문이 아니라 학자 차림으로 망나니짓을 하는, 예의라고는 손톱 만큼도 모르는 녀석.”

결국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칼 맑스는 법률학을 포기하고 철학의 길을 걷고자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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