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철학여행까페[73]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7.0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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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 급한 한 독일 청년이 러셀의 방을 두드렸다. 러셀은 이 학생과 이미 만나 논쟁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 학생이 독일식 악센트로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내가 완전히 바보인지 아닌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여보게, 나는 잘 모르겠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내게 묻나?”

“내가 바보라면 비행사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철학자가 될 생각입니다.”

“그러면 방학 동안에 철학의 문제에 대해 자네가 생각하는 것을 좀 써 와 보게. 그것을 보고 말해 주겠네.”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 그 청년은 다시 러셀을 찾아 왔다. 그 학생이 내민 글 첫 문장만 읽고 나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비행사가 되면 안되겠네.”

이동희
대학생 시절의 비트겐슈타인
러셀이 알아본 비트겐슈타인


러셀이 재능을 알아 본 이 청년은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공학도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수리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1911년 예나 대학의 프레게를 찾았다가 러셀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받았다.

그가 러셀을 찾아 캠브리지 트리니트 컬리지에 올 당시 러셀은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기초논리학의 고전이 된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막 출판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러셀의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내 강연이 끝나자 어떤 성질 급한 독일인이 논쟁을 하러 나에게 왔다. 나는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순전히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1911년 11월 16일)

그러나 러셀은 비트겐슈타인과 만난 지 2주가 지나기도 전에 그가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러셀은 그를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천재의 완전한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 신분에서 철학을 함께 고민하고 새로운 철학의 방향을 모색하는 러셀의 동료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영국의 시민으로 귀화해 영국에서 활동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유대인 혈통을 지닌 그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집안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집안 중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철강 산업을 지배하는 실업가이자 대부호였다. 어머니는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칼 비트겐슈타인은 많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의 집에는 음악가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등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13세가 될 때까지 가정교사를 통해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유대인 집안이었지만 그는 가톨릭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개신교로, 어머니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 8명의 자녀는 어머니의 주장에 따라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예술과 지적인 방면에 뛰어 난 능력을 보였다.

이동희
파울 비트겐슈타인
그의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파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오른 팔을 잃었지만 왼팔로 연주를 해 더 유명세를 탔다. 파울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 중 세 사람은 자살을 했다. 비트겐슈타인도 항상 자살의 생각으로 시달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13살 때 가정교육을 끝마치고 린츠에 있는 레알 슐레로 갔다. 레알 슐레는 기술자와 공무원을 양성하는 목표를 지닌 실용학교이다.

히틀러와 동문수학

흥미로운 것은 같은 시기에 아돌프 히틀러가 옆 반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평소에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비트겐슈타인은 베를린에서 공부를 한 뒤 1908년 항공기술을 배우기 위해 맨체스터로 왔다. 맨체스터 대학에서 3년 동안 지내면서 그는 항공기술 엔지니어로 분사반동엔진을 설계하기도 했고, 프로펠러도 설계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공학에서 점차 수학으로 그리고 철학적인 문제로 바뀌어 갔다.

그는 1911년에 수학과 논리학에 대한 개인적인 물음들을 토의하려고 예나의 수학교수 고트롭 프레게(Gottlob Frege)를 찾아 갔다. 프레게는 수학과 철학을 연구해 근대 수학논리의 기초를 세우려 애쓰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수학이나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프레게는 그에게 수학과 논리학의 연구를 심화시키려면 러셀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그는 프레게의 조언을 따랐다. 그는 엔지니어 공부를 중단하고 그때부터 철학자로서의 삶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캠브리지로 와서 러셀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말 잘 듣는 제자가 아니었다. 논쟁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고, 쉽게 화를 내며 공격적이기 까지 했다. 러셀, G.E. 무어 등 캠브리지 선생들과 항상 논쟁하며 싸우곤 했다. 금세 그는 가장 괴팍한 인물로 소문이 났다.

이동희
비트겐슈타인
그는 사교와도 담을 쌓았고, 사람들하고도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를 매지 않고, 수수하게 목이 트인 셔츠를 입고 다녔다. 이런 차림으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교 클럽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런 곳에 출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옷차림새는 캠브리지 대학 교수가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1913년에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가장 부유한 유럽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유산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유산 중의 일부를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예술가와 문인들에게 익명으로 기부하였다. 그는 부유하고 안락한 생활 대신에 극도의 검소한 생활을 택했다. 그에게 오히려 유산은 철학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나머지 유산들도 그는 누이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버렸다.

그는 1913년에 캠브리지를 떠나 노르웨이의 한적한 피오르드로 갔다. 그는 그곳에다 오두막을 손수 짓고 생활했다. 그는 캠브리지의 학자들에 둘러 쌓여 있으면 가장 근원적인 철학의 문제에 생각을 집중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철학의 근원적 물음에 집중하며 자신의 생각들을 스케치 해 두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평화주의자였던 스승 러셀과 달리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자원해서 입대했다. 우선 그는 포병대에서 행정 일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 행위와 떨어진 행정 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1916년에 자원해서 루마니아 국경 근처에 있는 전선으로 갔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광이 아니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가까이 목격하면서 그에 대해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은 전쟁이 끝나고 출간된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1)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그는 군대에 있는 동안 철학적 단상들을 노트에 적어 배낭에 휴대하고 다녔다. 그는 노트들을 여러 번에 걸쳐 정리했고, 순서를 재조정하고 번호를 붙였다. 이 노트들은 1918년 8월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포로 신세가 되었다. 몬테 카지노의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이 책을 러셀에게 보냈다. 1921년에 이 책은 독일어로 출판되었다. 얼마지 않아 러셀이 서문을 쓴 독일어와 영어 대역판이 출간되었다.

라틴어로 된 낮설은 제목의 이 <논리-철학 논고>는 논리적 실증주의와 분석적 언어철학의 토대가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수학 논문의 모범에 따라 7개의 테제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세계는 일어나는 일의 모든 것이다. 2. 일어나는 일, 즉 사실은 사태들로 성립된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다.

4. 사고는 뜻을 지닌 명제이다. 5. 명제는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 6. 진리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이다. 이것이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7개의 테제들을 보면, 어렵지만 그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이 7개의 테제들을 관통하는 것은 세계와 언어 그리고 논리라고 하는 세 가지 커다란 주제들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며 사실들은 세계를 형성함에 있어 논리적 관계를 갖는다. 우리의 사고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을 그린다.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해 우리의 사고는 논리적인 모사를 하는 것이다. 명제는 그러한 사고를 나타낸다. 언어는 이러한 명제들의 복잡한 연관이다. 이렇게 세계와 언어 사이에는 내적인 모사 관계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명제들은 ‘요소명제들’로 환원된다. 요소명제들은 단순 사태를 모사한다. 그리고 복잡한 명제들은 요소 명제들로 구성된다. 복잡한 명제들의 진리 값은 그 명제의 구성 요소인 요소 명제의 참과 거짓에 달려 있다. 요소명제와 결합된 사태가 존재한다면, 그 진술은 참일 것이다.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 중요한 테제는 언어의 차원을 넘어 선 보다 더 깊은 차원의 세계를 다룬다. 이 세계는 언어로 모사되지 않는 종교적이며 신비한 세계이다. 자아, 신, 세계의 의미 등등은 신비스러운 것은 언어의 경계 밖에 놓여 있다. 그 세계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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