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살할 수 없었다! 경찰은 왜 거짓말 하나?

공권력의 추한 거짓말, 신호수 의문사에 대해 국가는 사과해야 고상만l승인2012.04.0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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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 9개월전 부터 ‘장흥 공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사건 준비

운동권 학생이었던 92년, 나는 직업적인 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선택한 분야는 ‘인권운동’이었다. 거칠게 표현해서 7, 80년대가 ‘노동운동’이 대세였다면 87년 6월 항쟁이후 90년대 초까지 대세는 분명 ‘통일운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권운동’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90년 3월, 학생운동을 함께 하던 동료의 억울한 의문사를 밝히고자 싸우던 중 겪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너무나 힘들고 무섭고 고통스러웠던 그때, 누구라도 좋으니 나의 절박한 호소를 들어줄 누군가가 정말 그리웠다.

그러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영장이 발부된 91년 3월, 수갑과 포승줄로 묶인 채 호송되는 버스안에서 나는 ‘직업적인 인권운동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처음 했다. 그래서 나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나라도 작은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간절함이 이후 인권운동가의 길로 접어 든 계기가 되었다.

6공화국 최대 거짓말 ‘유서대필 강기훈 사건’

생각해보면 인권운동가의 숙명은 ‘세상의 거짓’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 활동한 단체가 ‘유서대필사건 강기훈 무죄석방 공대위’였다. 나는 그곳에서 간사로 일했다.

결론적으로 ‘유서대필 사건은 조작’이었다.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위’)의 발표였다. 진실은 역시 단순했다. ‘유서는 김기설의 필체가 맞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거짓말’이 공식적인 거짓으로 밝혀지는데 걸린 시간은 16년의 허망한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강기훈씨는 억울한 3년 2개월간의 감옥 생활을 감당해야 했다. 그와 그 가족들이 겪어야했던 정신적 고통과 상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그에게 위로를 전한다.

이처럼 내가 해온 인권운동은 ‘거짓과의 싸움’이었다. 예를 들어 경찰, 검찰 등 공권력의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여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대표적인 몇가지 사례를 들면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사망사건이라든가 전남 완도 존속살인 여 무기수 사건이 그랬다. 또 서울 모 여고 재산관리인으로 일하다가 청부 살해된 이 역시 아픈 상처로 남아 있고 살인범으로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어떤 청년의 불행한 사건 역시 내가 관여한 사건중 하나였다. 그중 또 하나의 기억은 신호수다.

억울한 죽음, 신호수를 아시나요?

1993년. 내가 두 번째 인권단체 활동가로 일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에서 만난 분들의 사연이다. 처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집안 벽면을 빼곡하게 가득 채웠던 영정 사진 앞에서 나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던 야만적인 시대가 있었다. 박종철, 이한열, 김성수, 이철규, 이내창, 박창수, 김귀정 등등등. 낯 익은 이름과 얼굴들 속에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이는 낯선 이름 ‘신호수’씨였다. 사건 당시 23살이었던 신호수(63년생)가 불행한 사건에 연루된 때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86년 6월 11일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86년 6월 11일, 신호수는 직장인 인천에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과 소속 경찰관에게 체포된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공안사건과 상관없는 그가 이같은 혐의로 체포된 이유는 자신의 자취방 장판 밑에 숨겨둔 북한 삐라 34장 때문이었다. 경위는 이랬다. 85년 전남 장흥에서 방위 복무를 하던 신호수는 소집 해제후 자취방에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이사온 방 주인이 방 바닥에 깔려있던 삐라를 발견했고 이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신호수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호수는 왜 이처럼 많은 삐라를 보관했던 것일까? 조사 결과 이는 군 포상휴가를 받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신호수가 복무하던 부대에서는 상당량의 삐라를 가져오면 포상 휴가를 줘 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신호수의 삐라 관련 의혹은 해소되었다. 하지만 신호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신호수의 사망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속이는데 분노

경찰 연행 8일이 지난 86년 6월 19일, 신호수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고향인 여수 돌산읍 대미산의 한 동굴에서 목매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반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호수의 사망 경위였다.

당시 경찰은 “신호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끝을 묶은 후 동굴 천정 부근의 바위 틈에 끼워 빠지지 않게 하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경찰의 이러한 주장은 억지에 불과했다. 신호수의 사체를 처음 목격한 유모씨가 2001년 의문사위에 출석하여 진술한 내용이다.

“(사건 직 후) 현장 검증에 참석하라고 하여 경찰들과 함께 동굴에 갔다. 그러면서 경찰이 나에게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이후 경찰들은 내가 목격한 것처럼 신호수의 자살 자세를 재현하고자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그렇다면 경찰은 왜 신호수의 자살 경로를 재현하지 못했을까. 애초부터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주장처럼 신호수가 자살하려면 약 2.5미터나 되는 동굴의 천장까지 올라가 그 틈에 옷의 뭉치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제3의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또는 사다리 등 도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실패는 당연했다.

그런데 불가능은 이것 말고도 또 있었다. 신호수의 자세였다. 사체 발견 당시 신호수는 묘하게도 양팔과 몸통이 허리띠로 묶여 있었다. 그래서 가정한다면 신호수는 먼저 자신의 양팔과 몸통을 허리띠로 묶어야 한다. 그런 후 자신의 키인 165cm보다 높은 250cm 위치의, 그러나 형태상 접근이 불가능한 바위까지 올라가서 목을 매야 자살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2중, 3중으로 불가능한 조건이었으니 당시 경찰의 ‘이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살 입증에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고 그 의혹의 끝은 당연히 신호수를 연행한 경찰을 향했다. 물론 경찰은 강력 부인했다. 특히 신호수를 연행한 경찰 차모씨는 “확인해보니 포상 휴가를 위해 삐라를 모아둔 것으로 밝혀져 3시간만에 훈방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차씨의 주장만 있을 뿐 석방된 신호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진실위 조사 과정에서 차씨의 주장과 배치되는 진술이 잇따랐다. 차씨와 같이 근무했던 그 당시 경찰관 4명의 진술이었다. 그들은 신호수가 연행된 후 적어도 3일 이상 서부경찰서에 있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즉, 3시간만에 신호수를 석방했다는 차씨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거짓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은 신호수를 연행한 이유가 삐라 신고를 받고 착수한 통상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달랐다.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경찰은 신호수를 연행하기 9개월 전 부터 경찰은 이른바 ‘장흥 공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이 사건을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놀랍게도 신호수의 혐의는 ‘간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호수에게 해명 몇마디 듣고 경찰이 ‘어! 그래’하고 석방했다니 믿을 수 있을까.

사체 발견 당시 신호수씨는 묘하게도 양팔과 몸통이 허리띠로 묶여 있었다. 아버지 신정학씨가 “자살자가 왜 이렇게 하냐는 것과 이렇게 해서는 자살할 수 없다”며 당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거짓과 싸우는 나는 ‘인권운동가’

이 뻔한 경찰의 거짓말이 ‘거짓말’로 밝혀지기까지 또 걸린 시간은 23년이었다. 2009년 11월 10일, 진실위는 “서부경찰서 수사관 차씨 등이 ‘장흥 공작’을 통해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자 이를 자살로 위장했던 것으로 판단한다”며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났어야 할 신호수의 불행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2011년 8월 29일, 진실위를 통해 밝혀진 결과를 가지고 신호수의 아버지 신정학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 구속으로 인한 신호수의 위자료 청구는 인정하나 경찰의 가혹행위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진실위의 발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말해 경찰의 거짓말에 대한민국 법원이 다시 한번 생명을 불어넣어준 ‘부끄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일흔이 넘은 아버지 신정학씨는 법정을 나와 말없이 담배를 물었다.

인권운동가인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중 하나가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수에게 부당한 처우를 강요할 때마다 즐겨 동원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국가가 이같은 논리로 거짓말을 정당화하고 국민을 속인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태가 그렇고 4대강 사업, 또한 김훈 중위 사건으로 대표되는 군 의문사를 비롯하여 남북 관계에서도 거짓말 논란은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요즘 ‘애매하면 북한측 소행’이라는 우스개 말이 세인들속에 떠 도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인권운동가로서 이러한 거짓과 싸울 것이다. 이것이 인권운동가인 내가 가진 ‘올바른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에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 알 수 없으나 포기하지 만 않는다면 진실은 반드시 승리함을 나는 역사속에서 확인했다. 그 길에서 많이 이들이 함께할 것이라 믿는다.


고상만 객원기자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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