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와 신화에서 당당했던 동이족 새벽 참모습 바로 보아야

"오-메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메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메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메 단풍 들것네’)

가을이면 심금(心琴) 어지럽히는 시에 눈 감습니다. 그의 다른 시처럼 ‘물 보면 흐르고 별 보면 또렷한’ 시인의 마음이 문득 당신의 마음이 됩니다. 단풍(丹楓)의 조화를 마주하면 우리나라 사람 거의 모두가 꺼내는 외마디 "오-메 단풍 들것네". 이 말은 어느덧 가을의 표지(標識)가 됐습니다.

‘가을’의 뜻으로 그려진 메뚜기 그림 갑골문.(진태하 교수 書)

시인의 가을은 단풍이었지만 갑골문(甲骨文)시대를 살던 옛 사람들에게 가을의 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문자학은 엉뚱하게도 메뚜기나 메뚜기 아래에 불[화(火)]을 놓은 그림이 ‘가을’의 (그림)글자라고 가르쳐줍니다.

日(일) 月(월) 山(산) 川(천)이야 있는 모양을 그린 것으로 소통(疏通)의 기호로 만들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을’과 같은 자연의 현상이나 법칙을 기호로 만들기가 쉽기만 했을까요?
황하(黃河)유역, 산동반도(山東半島), 발해만 일대 등 아시아 대륙의 동쪽을 근거지로 살던 기원전 1500년 무렵 이족(夷族) 은(殷)나라 사람들에게 벼와 같은 알곡 농사는 당시 금속(청동)무기와도 같은 첨단문명이었을 터입니다. 쌀농사의 훼방꾼인 메뚜기의 존재가 어찌 만만했겠습니까?

가을, 수확(收穫)의 들녘에서 메뚜기는 가을을 떠올리는 부호(符號)로 격상됩니다. 동이겨레는, 지금도 그러하듯, 그 미운 메뚜기를 불에 구워 먹었습니다. 메뚜기 또는 메뚜기와 불 그림이 시대를 지나며 간소(簡素)하게 변합니다. 도안(圖案) 즉 디자인이지요.

옛 글자 중에는 거북 귀(龜) 모양이 들어간 가을 추(秋)도 있다.(민중서림 ‘한한대자전’)

시간이 흐르며 메뚜기가 벼 화(禾)자로 바뀝니다. 벼에 붙어사는 곤충인 점이 그 연결고리였겠지요. 벼와 불 그림의 합체인 가을 추(秋)의 갑골문시대 모습입니다.

중국 현대 서예작품의 불(산 모양으로 변형) 위의 메뚜기 그림 秋자. ‘천년’ ‘오랜 세월’이란 뜻의 천추(千秋)자다.

‘한한대자전’은 전문(篆文)과 주(周)나라 때 글자 주문만을 보여줍니다. ‘화(禾)+화(火)+귀(龜). 뒤에 거북 귀(龜)를 생략해 秋가 됨. 고대에는 거북딱지에 불로 점을 침. 곡식 禾를 덧붙여 가을을 나타냄’이라고 풀었네요. 네이버 자전은 (추)의 간체자. 옛글자는 (추). 秋는 곡식 말리는 계절-가을’이라고 秋의 어원을 설명합니다.

이런 새김에 많은 사람들이 익숙합니다. 또 글자 모양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문자 해석의 큰 기준은 역사성입니다. 동이족 나라 은(殷)이 대륙 서쪽에서 몰려든 화하족(華夏族)의 주(周)나라에 밀려난 후, 사람은 물론 문자를 포함한 은의 문명에 가해졌을 고난을 상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뚜기와 불의 이미지가 그렇게 사라졌을까요?

그 글자가 만들어진 후 3천년은 너끈히 흘렀습니다. 백년 전 쯤 황하 유역에서 신비스런 그림과 기호가 새겨진 거북 배딱지와 소 어깨뼈가 출토되기 시작했습니다. ‘설문해자’를 지은 허신(許愼)도 못 보았던 원본 글자 갑골문이 돌연(突然) 현대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동이(東夷)계열 치우(蚩尤)천왕의 장쾌(壯快)한 모습은 축구장에 높이 걸고 환호하는 오늘날의 우리가 ‘치우’와 맥락을 함께 하는 은(殷)나라 갑골문이나 그 내림인 동아시아 문자(한자)에 대해서는 애써 모르쇠가 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 문자의 새벽을 연 것은 바로 동이겨레였습니다.

본디를 봐야 합니다. 수천 년 시간이 비튼 역사의 굴곡(屈曲)과 식민주의자 일본이 독도 훔치려 했듯 날조(捏造)한 우리 역사의 굴욕(屈辱)을 젖히고 그 바탕을 밝혀야 합니다. 비로소 역사가, 문자의 첫 마음들과 함께 환해질 터입니다. 우리 겨레만의 풍습(風習)과 가까운 한자가 많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메뚜기를 불에 구워먹는 것과 우리만의 벼농사가 결합해 가을 秋를 이룬 것도 그 증거지요.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메뚜기를 안 먹습니다.

백제 유물들 중에는 치우신왕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는 귀신의 얼굴(귀면鬼面)이 자주 등장한다. 귀면무늬벽돌.(국립부여박물관)

일(日) 월(月) 글자의 바탕인 고구려 고분벽화의 해와 달의 신. 다리 셋 달린 까마귀가 해 안에 들어있다.

삼족오(三足烏) 태양 그림처럼, 가을을 보는 우리의 정서(情緖)는 역사책이나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먼저 존재했을 터입니다. 영랑의 시 한 대목의 단풍이 유독 우리를 흔드는 까닭입니다. 상고사와 신화에서도 당당했던 동이족 새벽의 참모습을 바로 보는 일, 긍지 되살리는 길이지요.

<토/막/새/김> 처우천왕과 염제 치우천왕은 동아시아 고대신화의 영웅적 무신(武神)이다. 신농(神農)으로도 불리는 염제(炎帝)와 함께 동이족 지도자다. 화하족의 거물 황제(黃帝)와 탁록대전 끝에 패멸한 것으로 묘사된다. 비록 패장(敗將)이지만 그 용맹성 때문에 우리 현대사에서까지 ‘전쟁의 신’으로 추앙된다. 월드컵 4강 ‘신화’ 응원전의 상징으로 우리 현대사에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염제는 불의 신으로, 또 농사와 치유(治癒)의 신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소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가진 신으로 등장한다. 신화에서는 탁록대전 이전에 황제에게 무너진 것으로 기록된다. 환웅과 웅녀 사이의 단군, 해모수와 유화 사이의 주몽과 같은 역사와 신화의 갈림길에 서있는 주인공들의 수장(首長) 격인 환인(桓因)도 이 신화에서 염제 계열로 구분된다.

강상헌 논설주간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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