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을 사과로 알아들으라는 건 사기

강상헌 칼럼 강상헌l승인2012.09.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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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게 물든 입술 /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기성세대를 향한 삿대질, 시대가 그를 그렇게 섭섭하게 했겠지.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대유감’이라는 노래에서 했던 얘기의 한 조각이다.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입술과 흰 치아가 미인(美人)의 모습이다. 정직하지 못한 검은 입술, 90년대 후반 서태지가 그의 수많은 ‘친구들’에게 높이 들어 보인 상징(象徵)은 아직도 강력하다.

유감, ‘마음에 남는 섭섭함’이다. 국어사전은 이 새김 말고도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아 아쉽거나 한스러운 것’ ‘언짢게 여기는 마음’ 등으로 푼다.

한자로는 ‘남길 유(遺)’와 ‘섭섭할 감(憾)’이다. 인터넷 등에서 이 글자 뒤에 괄호를 하고 有感 遺感 有憾 등을 적은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有感[유:감]은 ‘가을이 오니 (여름과 다른) 느낌이 든다’는 투의 낱말로 우리가 여기서 궁리하는 그 ‘유감’과 다르다. 차라리 한자를 쓰지나 말지, 遺感 有憾은 맞지 않는 단어들이다.

유감(遺憾)이라 쓰고는 ‘사과(謝過)의 뜻, 미안하다는 말로 대충 알아들으시게’하는 식의 우격다짐 어법(語法)이 때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말씀하시는 이들’은 대개 정치인들이다. 몰염치(沒廉恥)의 화신(化身)과도 같은 일본 일부 정치인들이 자기 선조들 못난 짓 감추고자 하는 얘기에도 이 단어는 ‘약방(藥房)의 감초(甘草)’격이다.

회사원인 서울의 독자 장민제 씨가 ‘이 말의 진정성에 대해 좀 따져 달라’며 필자에게 맡긴 숙제이기도 하다. ‘미안하다’ 해야 할 때 ‘유감스럽다’고들 하나 내 마음이 한 올도 풀어지지 않으니 이 말의 정체는 도대체 뭐냐 하는 질문이었다.

뜯어봐도 ‘유감’을 사과나 사죄(謝罪)로 여겨야 할 이유는 없다. ‘제가 잘못 했으니 용서해 주세요’가 아니다. 다만 ‘내 기분이 좀 꺼림칙하다’ 정도의 뜻이다. 분명한 사과를 하지 않으면서 흐지부지 본질을 덮어 상대방을 혼란케 할 (나쁜) 의도로 말의 뜻을 인신(引伸)한 것이다. 인신은 한자학 용어로 ‘(억지로) 잡아당기거나 펴서 말뜻을 바꾸거나 늘이는 것’이다.

한자문화권인 한(韓) 중(中) 일(日) 3국간 유통되는 외교적 표현이나 정치적 수사(修辭)의 대표적인 단어다. 제국주의 깃발 흔들며 엄청난 살육(殺戮)과 도적질을 일삼던 나라가 피해 상대방 나라들에 ‘유감’이라고 했다. 황당하다. 이 나라는 ‘통석(痛惜)의 염(念)’이라는 본말(本末)을 뒤집는 기발(奇拔)한 말도 생산해 주변 나라의 입질에 오래 오르고 있다.

정직하지 못한 이들이나, 말과 글의 본디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 중 상당수가 이 유감이란 말을 쓴다. 이 말 즐기는 이들을 보니, 항의(抗議)하면서도 유감이라 하더니 ‘사과의 뜻’으로도 유감이란다. 봉숭아학당 식의 우화적(寓話的) 풍경이다.

그러다 보니 이 말을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하라’란 의도(意圖)의 세련된 표현인양 으쓱하며 쓰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또 새롭게 말글 익히는 이들 중에는 이런 곡절(曲折)도 알지 못한 채 ‘유감’을 ‘미안’의 비슷한 말로 아는 이도 있으리라. 얼른 바루어야 할 오염(汚染)된 말이다.

감정이란 말이 있다. 感情은 ‘느낌’의 뜻이고, 憾情은 ‘원망하거나 성내는 마음’이다. “내게 감정 있어? 왜 그리 무례하지?”할 땐 憾情이다. 느낌 감(感) 앞에 마음 심(心과 같은 글자)이 붙어 ‘섭섭하다’는 감(憾)이 됐다. 유감의 ‘감’이다. 그림 같은 한자의 구조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낱말의 속뜻 헤아리는 ‘쿨’한 방법 중 하나다. 자주 보면 문득 친해진다.

제 잘못이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용서(容恕)를 비는 표현들. 사과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 사죄는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빎’이다. 미안(未安)하다는 ‘남에게 대해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럽다’, 죄송하다는 ‘죄스러울 정도로 황송(惶悚)하다’, 송구(悚懼)하다는 ‘두려워 마음이 거북하다’의 뜻. 각각 뒷말이 더 강도(强度)가 높다. 송(悚) 황(惶) 구(懼)는 다 ‘두렵다’는 뜻. 꾸밈없는 이 말들과 ‘유감’의 말뜻 차이(差異)는 크다. 그런데도 일부에서 얼추 비슷하게 쓰이는 요즘의 이런 상황, 시대에 유감을 표명(表明)해야 하나? ‘서태지의 삿대질’은 아직 시퍼렇게 유효하다.


강상헌 논설주간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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