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푸른 하늘인 창공(蒼空)을 휘감은 용을 그린 글자

목계나루터의 신경림 시비.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시 ‘목계장터’의 앞부분)

남한강변 충주 목계나루터 신경림 시인의 시(詩)를 새긴 비석(碑石), 시인은 여기에 무지개를 숨겨두었습니다.

한 바탕 퍼붓고 난 비가 나루터 언덕 빈 하늘에 무지개를 걸었네요. ‘흩어진 청룡 흑룡’이 무지개입니다. 쌍무지개가 떴을까요, 시인의 가슴에?

중국 땅 황하강 유역에 살던 갑골문 시대 사람들은 무지개를 용(龍)으로 봤습니다. 양쪽 끝에 하나씩 머리 둘 달린 용이 강가에 머리를 박고 혹은 물을 마시고 혹은 재미거리를 찾는 것 같은 모습의 문자(그림)를 그렸지요.

신성한 동물로 그려진 갑골문의 무지개, 이렇듯 비유와 상징에 능한 인간은 원초적 화가이자 타고난 시인이었답니다.

무지개를 상상 속의 거대한 용으로 상정(想定)한 스토리텔링의 결과가 바로 갑골문의 무지개 그림문자였습니다. 이 글자는 오랜 세월을 겪으며 원래 모습과는 크게 다른 모습으로 변하지요.

용 그림이 있는 우리나라 옛 사주(四柱)책(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지금 쓰이는 무지개 홍(虹)자는 맑고 푸른 하늘인 창공(蒼空)을 휘감은 벌레 즉 용을 그린 글자입니다. 갑골문 시대의 상상력이 손상되지 않고 전해진 것이지요.

고건축에서 자주 접하는 홍예교(虹霓橋) 홍예문(虹霓門)이 무지개 형태를 한 다리와 문입니다. 시각적(視覺的)으로도 아름답지만, 공학적(工學的)으로도 완전하다고 하지요. 예(霓)자 또한 ‘무지개’를 뜻합니다. 자연에, 또 건축물에 걸어놓은 우리 전통의 무지개도 절묘하군요.

‘홍예’라는 낱말도 예쁘지만, 우리말 ‘무지개’의 상큼한 어감(語感)에 비길 수는 없겠습니다. 물과 지게(등짐 기구가 아닌 ‘작은 문’을 뜻하는 말)를 합친 ‘물지게’가 ‘무지개’로 변한 것이라고 국어학자들은 설명합니다. 무지개다리, 무지개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비 온 후 해의 반대편에 나타나는 일곱 색깔의 원호(圓弧)로 공기 중의 물방울에 의해 태양광선이 반사 굴절되어 나타나는 기상현상’이라는 물리적인 정의(定義)도 중요합니다.

갑골문의 홍(虹)자. 오른쪽 세 줄의 왼쪽 줄 세 번째 글자다. 그 줄을 현대문자로 옮기면 유출홍자북음우하(有出虹自北飮于河), 북쪽에 무지개가 떠서 황하 물을 마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설명으로 만족하기엔 무지개가 너무 신비롭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차라리 용이 물을 들이켜고 있는 그림이 더 절실(切實)하지 않을까요. 호(弧)는 활 모양 곡선을 말합니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의 이 시는 서양 사람들이 무지개를 사랑하는 정서의 대표작이겠습니다. 1802년 지어진 이 시의 첫머리를 보지요.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 내 가슴 설레느니...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 A rainbow in the sky...)

이 시는 끝 부분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인류 구원의 목소리까지를 보듬어냅니다.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빚은 시 정신의 승리군요. 순진무구(純眞無垢) 천진난만(天眞爛漫)의 동심(童心)이야말로 우리가 끝내 잃지 말아야 할 가치가 아닐까요?

영어 단어 레인보우는 비(rain)와 활(bow)을 합친 단어입니다. ‘비가 만들어 낸 활(모양)’이라는 이미지로 만든 것이겠지요. 이 또한 예쁜 시정(詩情)이네요. 문자의 발생(發生)과 변천(變遷)은 이런 시적인 상상력과 함께 보아야 즐겁습니다.

갑골문 무재개 홍(虹)자.

또 이런 마음으로 보아야 사물의 본디가 보입니다. 스마트폰은 없었지만, 분업화 전문화로 현대화되기 전의 인간은 지금보다 완전에 훨씬 더 가까운 인간성을 지녔을 것입니다. ‘시인의 소양(素養)을 지닌 농업인’과 같은, 자연의 본디와 숨을 함께 쉬는 인간의 모델을 떠올려봅니다. 비록 옛 모습이었겠지만, 이는 실은 오늘에 있어서 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귀한 까닭이겠습니다. 그 마음이라야 비로소 ‘더 좋은 세상’은 가능할 것입니다. 다 알지요. 그러나 애써 외면합니다. 진실과 맞짱 뜨는 것이 겁나고 부끄러운 까닭인가요.

어느 주말, 목계장터에 시인이 걸어둔 그 무지개를 만나러 갑시다. 내 가슴 설레게 하는 그 청룡 흑룡을 봅시다. 더 치열하게 부끄러워합시다.

토/막/새/김 소전체 虹자(민중서림 한한대자전). 무지개 홍(虹)자는 벌레 훼에서 뜻[形]을, 빌 공(空)에서 소리[聲]를 따서 만든 형성(形聲)문자로 중국 진시황의 문자개혁에 의한 소전체(小篆體)에 처음 등장한다. 벌레 훼자를 청나라 학자 단옥재(段玉裁)는 ‘벌레가 누워 있는 것’이라고 풀었다.(염정삼 저 <설문해자주 부수자역해>) 벌레 충(蟲)도 ‘훼’로도 읽는다. 빌 공(空)에서 따온 공(工)이 소리요소이면서 하늘이라는 뜻도 보태는 것은 한자의 표현방식에서 흔히 보이는 방법이다. 이런 지식은 한자를 읽는 ‘정서적 논리’이며, 이해의 테크닉이다.

강상헌 논설주간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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