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의혹에 '천벌' 운운…'천벌' 받습니다”

고상만l승인2012.09.28 16:48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사실과 합리성 없는 비난, 그렇게 강조하는 기자정신은 어디에?
전직 의문사위 조사관 “차라리 나에게 물어라”

목격자가 사건 당일 본 것은 무엇이며
이후 어디로 갔고 만난 이는 누구인지 의문투성

의혹이 다 규명되어 조사가 끝난 것이 아닌
조사기간 종료로 의혹만 남긴 채 문이 닫힌 분명한 의문사

"고상만 조사관. 오늘 인터넷에 올라온 조갑제씨 글 봤어요?"

지난 2일 아침, 장준하 기념사업회 이준영 사무국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전날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다룬 방송이 나간 후 보수논객이라 불리는 전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씨가 사인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에 대해 '천벌' 운운하는 글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인지 인터넷을 뒤져 조갑제씨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름 기대했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그의 주장에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과연 조갑제씨가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해 좀 알아보기나 하고 이런 글을 쓴 것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특히 입만 열면 이른바 '기자 정신'을 들먹이며 기자들의 게으른 행태를 비난해 온 조갑제씨의 그간 언행에 견줘 봐도 더욱 그렇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조갑제씨는 <월간조선>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오래 일했습니다. 오늘에 와서 그에 대한 평가가 매우 갈리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등에서 보여준 그의 기자로서의 활약은 저 역시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가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에 대해 접근하는 자세는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해 '근거도 없는 의혹 제기'이라며 심하게 비판하면서 고작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 것이 지난 93년 5월 보도된 <월간조선>의 장준하 선생 의문사 관련 기사라는 점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준하 선생 사인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을 향한 그의 비판 수준이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말하는 '기자 정신'이 이런 것이라면 누군들 실망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왼쪽)와 서상섭 장준하기념사업회 상임운영위원장이 지난 20일 서울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유신정권에 맞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지난 1975년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 사건의 재조사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진정서를 접수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이를 제지하는 경찰에게 항의하고 있다.

19년 전 <월간조선>만 붙잡고 의혹 비판하는 조갑제에 실망

저는 조갑제씨를 인격적으로 모독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천벌' 운운하면서 장준하 선생 사인에 의혹을 제기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격하게 비난하는 그의 주장은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이 사건의 진실을 가장 가까이에서 살펴본 사람으로서 이는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3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 사건 조사팀장으로 일했던 사람으로서 조갑제씨의 잘못된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답하고자 합니다.

또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에 스스로 끼어들어 논쟁하고자 하는 조갑제씨에게 저 역시 묻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제가 쓴 이 글을 그가 읽을지, 그리고 내가 묻는 말에 그가 어떤 답을 해줄지 알 수 없으나 그 결과를 함께 지켜보는 것 역시 재미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조갑제씨가 '그것이 알고 싶다' 방영후 "근거없는 의혹"이라며 쓴 반박글에 대해 하나 하나 답변하는 식으로 글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것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해하는데 좀 더 쉬울 것이라 생각해서입니다. 참고로 조갑제씨가 올린 글은 상당히 긴 내용이지만 이것을 전부 다 다루기에는 너무 지루하기에 그가 핵심으로 지적한 내용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합니다.

조갑제 = "5.16 군사혁명을 적극 지지한 적도 있는 장씨를 박정희 정권이 왜 죽이려 하였을까? 더구나 당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정적을 암살한 적은 한번도 없는데 왜 굳이 장준하를?"

장준하 선생이 5. 16 군사 쿠데타를 초기에 지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쿠데타를 일으킨 그 자체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당시 만연한 사회 부패 현상인 '불량 도당의 소탕, 부정축재자 처리, 그리고 농어촌의 고리채 정리' 등을 해소하는 역할로서 군인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독립군 출신이라서 군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있었음은 많은 이들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장준하 선생은 61년 6월호 사상계를 통해 문제의 이 글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더욱 강조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사회 부패를 일소하는 일들을 완수하고 최단 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스스로 약속한 이른바 '혁명 공약'을 군인답게 실천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이같은 민정 이양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나아가 이후 18년간이나 장기 군사 독재를 했습니다. 특히 1972년 사실상의 총통제인 '유신'까지 선포하면서 민주주의는 실종되고 만 것입니다.

장준하 선생이 이 유신독재기간 무려 37번이나 체포되고 9번 구금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약속한 민정 이양을 파기한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대해 장준하 선생은 분노했고 그래서 반유신 투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것입니다.

장준하 영향력 크지 않았다?

두 번째로 (75년) '당시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주장은 장준하 선생에 대한 너무 지나친 '비하'입니다. 74년 12월 24일 시작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만 가지고 말하겠습니다. 이 운동은 시작된 지 단 10일 만에 30만 명이 서명에 동참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습니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당시 청와대 대변인 김성진씨가 박정희 대통령 명의로 발표한 담화문 내용입니다. 유신 체제하에서 거의 '신적인 존재'였던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서 '서명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했다면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된 이 운동의 열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달아 올랐습니다. 결국 박정희 독재 정권이 선택한 유일한 수단은 '긴급조치권 발동'이었습니다. 72년 선포된 유신 헌법의 독소조항이면서 그동안 한번도 행사하지 않았던 긴급조치권까지 발동하면서 구속시킨 첫 번째 대상자가 바로 장준하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갑제씨가 "장준하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고 했다니 정말 예의가 아니죠.

세 번째, "박정희 정권이 정적을 암살한 적이 없다"는 주장은 1973년 8월 8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일본 도쿄에서 납치한 사건만 봐도 무색한 주장입니다. "김대중을 죽인 적이 없지 않느냐"는 식의 반문은 사양하겠습니다. 납치 직후 미국과 일본정부에 우리나라 중정에 의한 김대중 납치 사실이 알려진 상황에서 그를 죽일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뿐인가요? 1973년 서울대 교수 회의에서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중정에서 타살되었음에도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간첩 혐의로 자책하던 중 투신 자살'한 것으로 조작되어 왔습니다.

또한 조작 사건인 인혁당 사형수 8인을 비롯하여 71년 전남 목포 선거관리위원 김창수 사망 조작 사건 역시 모두 박정희 정권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차고 넘치니 그만 하겠습니다.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지난 7일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사건과 관련해 재조사를 촉구하는 '범국민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었다”

조갑제 = "암살을 하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지 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산행하는 공개된 상황을 선택하였을까? 더구나 등산과 하산 코스는 장준하가 선택한 것이지 누가 유도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틀렸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공개된 장소에서 암살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산행을 갔지만 결국 그가 숨질 때 주변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한 사람만 있는 곳에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유일한 목격을 자처하는 김용환씨가 사고 당일 도대체 뭘 봤다는 것인지 일관되게 진술한 사실이 없다는 점이 기괴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의 사망 경위에 대해 때로는 "소나무를 잡다가 휘어서 떨어졌다"고 하고 또 어느 때는 "억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 선생이 떨어지고 있었다"라고도 했으며 또 어느때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장준하 선생이 보이지 않았다"는 식의 팔색조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이같은 진술은 재판장으로부터 "진술에 일관성이 없어 신뢰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도 남을 일입니다.

두 번째는 "등산과 하산 코스를 장준하가 선택한 것이지 누가 유도한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2기 의문사위는 최종 조사 결과에서 "목격자 김용환씨가 주장하는 당일 산행은 없었다" 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김용환씨가 말하는 바와 같은 산행을 위해서는 적어도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용환씨는 길어야 30~40분 정도 밖에 안되는 시간동안 군인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난 후 다시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샌드위치를 먹고 다시 하산을 했다고 하니 이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김용환, 진술 일관성 없어

더 이상한 일은 저와 열다섯번 이상 만난 김용환씨가 조사과정에서 장준하 선생과 등반했다는 산행 코스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마당에 유일하게 그 경로를 알고 있을 김용환씨가 설명한 적이 없어 산행 코스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방송중 산행 코스라며 보여준 내용은, 그래서 잘못된 내용입니다.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적이 없는데 무슨 근거로 그와 같은 내용이 나왔나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은 김용환씨와 장준하 선생이 당일 산행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은 우리만의 결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75년 의정부지청 검사로 있으면서 장준하 선생 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서돈양 검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2003년 의문사위 조사에서 우리가 사건 당시 김용환씨를 상대로 '산행 여부'를 조사했는지 묻자 "장준하 선생과 김용환씨가 산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당시 판단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이유는 우리와 같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정상까지 가서 샌드위치를 먹고 다시 하산까지 했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여 당일 산행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장준하 선생의 산행은 이를 뒷받침하는 김용환씨의 새로운 진술이 없는 한, 현재로서는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조갑제 = "장준하 추락사 사건을 조사한 경찰이나 검사 그 어느 누구도 누군가로부터 간섭이나 압력을 받았다는 이가 없다. 유족들이 타살이라고 당시에 주장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조갑제씨. 잘못 알고 있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후 밤새 시신이 있던 사건 현장을 경비하고 또한 중정 요원이 빈번히 방문하여 사건 기록까지 필사해 간 곳은 모두 이동파출소였습니다. 이들 이동파출소 경찰관들의 일관된 진술에 의하면 당시 파출소를 방문한 중정 요원들은 자신들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함구할 것을 요구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 사건을 취재하던 당시 동아일보 송석형 기자는 상부로부터 '무조건 취재 중단' 지시를 받았고 이에 대해 의문사위가 조사한 결과 당시 언론사를 담당했던 중정의 요구에 의해 취재 중단을 지시한 것이라는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나아가 이 사건의 의혹을 보도했던 동아일보 장봉진 기자 등은 급기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고통을 받았으며 외신기자 '로이 황' 역시 장준하 선생 사건에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 때문에 강제 추방까지 당했습니다.

이런 것을 외압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을 외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감히 누가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쓰고 그 진실을 추적할 수 있단 말입니까?

두개골 골절인데 보온병은 멀쩡하다니...

두 번째 반박은 그래서 솔직히 답할 이유도 없습니다. "유족이 당시 타살이라고 주장한 기록도 없다"는 말은 만약 그 시대를 살지 않았고,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아주 순진한 상식만 가진 사람의 질문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이건 아니죠.

당시 아버지와 남편이었던 장준하 선생의 이 처참하고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도 그 유족이 크게 소리내어 울지 보지도 못한 이유를 조갑제씨가 정말 모르겠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천벌'받을 소리라고 비난받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조갑제 = "SBS 진행자는 일행이 점심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있을 장준하씨가 가져간 샌드위치를 먹은 것도 이상하다고 억지를 부린다. 등산중 간식을 먹는 것도 의문점이라니?"

저야말로 조갑제씨의 반박이 이상합니다. 사건 당일 일행 중 한명인 김희로씨에 따르면 장준하 선생이 "내가 잠시 산을 둘러보고 올테니 그동안 밥을 해놓으라"고 했다는데 그런 장 선생이 샌드위치를 먹었다고 하니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지 않나요?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는 충분한 정황이라고 생각되지만 저는 이것보다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정황이 있습니다.

바로 샌드위치와 함께 먹고자 커피를 담아왔다는 '보온병'입니다. 김용환씨의 주장에 의하면 처음 산행을 시작할 때는 자신이 장준하 선생에게 등산 가방을 건네받아 등에 지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 정상을 거쳐 조금 밑으로 내려온 후 샌드위치를 먹었고 이후 다시 하산하면서 장 선생이 문제의 등산 가방을 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의 주장처럼 만약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했고, 그래서 이번에 확인된 것처럼 두개골에 6센티미터 가량의 골절과 엉치뼈 역시 부러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면 등에 지고 있던 가방 안의 보온병도 깨져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는 사실입니다.

혹 그 시절 보온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분을 위해 간략히 설명한다면 그 당시 보온병은 지금과 달리 병 안이 유리로 되어 있어 아주 가벼운 충격에도 산산이 부서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온병이 파손되지 않은 채 멀쩡했다는 사실은 따라서 '장준하 선생이 14.7미터 높이에서 추락하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조갑제씨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갑제 = "김용환씨의 사건 전후 생활은 반듯한 교육자의 전형이다. 이런 사람을 살인범으로 단정하려면 누구로부터 사주를 받았다는 정도의 소설이라도 써야 할 것 아닌가?"

저는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가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국가 차원의 재조사'를 통해 밝혀내야 할 일이지 여론 재판이나 사람들의 심증만으로 결론을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조갑제씨처럼 또 다른 편견을 가지고 말하는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즉,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뭐뭐가 아닐 것'이라는 식의 주장은 적어도 '기자 정신'의 대가를 자처하시는 분이 할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조갑제씨가 이같이 지적하는데 제가 답변하지 않으면 이것도 '자신없어 그런 것'이라고 몰아칠까 우려되어 일부나마 '불편한 진실'을 밝힙니다. 조갑제씨는 마치 김용환씨가 사건이 발생한 75년 8월 17일 훨씬 이전부터 교육계에 몸담고 온 교육자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특히 최근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에서는 김용환씨가 장준하 선생을 처음 만난 67년 이전부터 교사였던 것처럼 쓰기도 하고 또 어떤 보수단체와 보수 인터넷 매체에서는 그가 교장 출신의 교육자라며 조갑제씨와 마찬가지 논조로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에 대해 공박했습니다.

도대체 진실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마구 나서 오히려 엉뚱한 의혹을 재생산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보수단체·언론 의혹 재생산

사실은 이렇습니다. 조사 결과 그는 75년 8월 17일 사고가 발생하기 바로 5달 전인 1975년 3월에 처음 모 중학교 '시간 강사'로 취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김용환씨가 정식 교사로 채용된 것은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고 1년이 지난 1976년 8월의 일입니다. 당시 여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이 이사장으로 있던 사립고등학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맡았던 직위는 '교장'이 아닌 '교감'입니다. 하지만 이는 평교사로 있다가 퇴직할 경우 명예 차원에서 마지막 날 교감으로 발령내는 '명예 교감'이었습니다.

저는 이같은 김용환씨의 경력에 대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더 많은 사실과 내용이 있지만 사건의 실체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지극히 김용환씨의 개인사를 왜 언급해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를 먼저 이야기하고 이것이 마치 대단한 의미인 것처럼 보수언론과 인사들이 기사로 쓰고 광고를 내는 행태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오히려 정치적 편견을 가지고 마구 떠들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이 사건을 재조사하여 정리하면 될 사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육자이기에 그가 혐의가 '있네, 없네' 하는 말이나 '했다면 누구에게 사주를 받았느냐'는 식의 반문에 대해서는 따로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이 사건 전반에서 진짜 순수한 목격자였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단정하거나 묻는 것 자체가 오히려 김용환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갑제 = "사망 당시의 검안 소견(추락사)을 믿지 않고 37년이 흐른 뒤 파낸 유골의 사진을 놓고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무모함은 언론의 영역을 떠난 행위이다. 막장 드라마의 본산인 SBS는 모든 걸 드라마화하는 체질이 있는가?

사망 당시 장준하 선생이 추락사로 정리된 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의 일방적인 '실족 추락사'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검안 소견 역시 그의 주장에 따라 작성된 것이지 무슨 객관적인 수사 결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건은 오직 김용환씨의 일방적 주장에 기인된 것이며 이에 따라 지난 37년간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실족 추락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조갑제씨 주장처럼 당시 자신이 목격한 사실이 무엇인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했으면 좋은데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37년이나 지난 사건을 어떻게 다 자세히 기억할 수 있느냐"며 반문합니다. 실상을 모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는 이 사건 발생 바로 다음날인 75년 8월 18일 장준하 선생 빈소에서 문익환, 계훈제, 함석헌 선생 등을 앞에 두고 사건 경위를 설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단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그때의 진술은 정확한 기억에 의한 사실이어야 합니다. 그가 순수한 목격자라면 더욱 그래야 합니다.

민사회와 정계 인가들이 지난달 17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서 열린 故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함께하고 있다.

목격자 주장만 믿고 사건 덮었는지 이해불가

그때 김용환씨가 장준하의 추락 경위를 묻는 문익환 목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선생님이 나무 윗부분을 잡으시고 아마 나무… 그래서 제가 여기서 보았을 때 나무가 휘는 걸 봤어요. 옆에서 봤어요."

당시 문익환 목사가 김용환씨의 진술을 녹음했는데 그 테이프에서 확인된 진술이었습니다. 또한 75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장준하 사망 경위' 관련 기사에서 장봉진 기자는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 가지를 잡다가 휘어서 실족 추락사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장 기자는 이 기사 팩트를 얻게 된 경위가 사건 발생 다음날인 8월 18일, 의정부 지청 서돈양 검사에게 조사받고 나오는 목격자 김용환씨에게 직접 들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뒤집는 새로운 진술은 놀랍게도 김용환씨, 바로 그였습니다. 1988년 포천 경찰서 재조사 기록에서였습니다. 그는 경찰 한희권씨가 장 선생 추락 당시 목격한 사실을 묻는 질문에 "저는 장준하씨가 실족 추락할 때 소나무를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보지 못하였는데, 며칠 후 동아일보 신문에서 소나무를 잡고 내려오다 떨어졌다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반전입니다. 지난 37년간 장준하 선생이 소나무 가지를 잡다가 휘어서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는 김용환씨가, 그래서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사하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는데 무슨 근거없는 의혹 제기냐"며 조갑제씨마저 당당하게 내세운 그가 이 모든 '신뢰적 전제'를 무너뜨린 것 아닌가요. 도대체 왜 그는 자꾸 목격 진술을 바꾸는 것일까요?

사망 당시의 검안 소견(추락사)을 믿지 않고 37년이 흐른 뒤 파낸 유골의 사진을 놓고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무모함'이라는 조갑제씨의 표현은, 그래서 틀린 것입니다. 과학적인 수사를 통해 적어도 당시 강제 부검을 해서라도 의혹을 밝혔어야 할 수사기관이 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채 단지 목격자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만 듣고 이 사건을 덮은 것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진 것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변사 사건'이며 이 경우 설령 유족이 부검을 반대한다 할지라도 의혹이 있다면 검사가 부검를 강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음에도 왜 당시 수사기관은 이 사건을 실족 추락사로 '처리'한 것일까? 이 사건 조사관으로서 저는 너무나 안타깝고 내내 안타까웠습니다.

조갑제씨가 말하는 '천벌' 주장을 경멸한다

"비판은 자유이지만 사실과 합리성에 기초해 비판해야 비판받는 사람한테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이다. 허위와 선동과 감정으로 누구를 비판한다면 역효과가 날 것이다. 그것을 당하는 쪽에서는 비판한 쪽을 경멸하게 된다."

이 말, 기억나시죠? 바로 '조갑제닷컴'에서 찾은 조갑제씨의 말입니다. 맞습니다. 비판은 자유지만 적어도 '사실과 합리성에 기초해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갑제씨는 스스로 행한 말과 달리 장준하 선생 사건에 대한 사실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 논리로 추측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들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저주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처럼 사실과 합리성이 없는 비판을 당하는 우리로서는 조갑제씨 말대로 조갑제씨를 경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조갑제씨는 최근 매일경제방송에 출연하여 또 다시 기자들을 게으르다며 질타하면서 "목격자인 김용환 선생을 만나 보자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국의 기자가 2만 명인데 어떻게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 씨를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 사람의 반론을 쓰지 않습니까? 김용환 씨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설명만 들으면 몇 분 만에 끝난다. 아니 몇 초 만에 끝나는 사건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이 그렇다면 조갑제씨는 왜 김용환씨의 말만 믿고 이 사건을 직접 조사한 저에게는 단 한번도 뭘 물어보거나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이런 주장을 합니까? 이처럼 확신에 차서 '의혹 조작'이라며 글과 방송까지 하는 과정에서 왜 김용환씨 한사람의 일방적인 주장만 신뢰하고 그와 다르게 진술하는 전직 경찰과 검사 등 수많은 참고인들의 합리적인 주장은 전부 거짓이라고 외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자 정신'의 대가를 자처하는 분으로서 당연히 저같은 사람에게 "왜 당신은 김용환씨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고 한번 물어라도 본 후 그것이 마음에 안 들면 그 다음에 비판해야 마땅한 일이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조갑제씨의 주장처럼 김용환씨를 살인범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다만 그를 조사하면서 끝내 이해할 수 없어 수십번 물어봤고 지금도 역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건 당일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이며 사건 이후 어디로 갔고 그 사이 만난 이들은 누구냐"는 이 단순하고도 쉬운 세가지 질문에 김용환씨는 제가 믿을 수 있는 진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갑제씨가 말하는 "1분, 아니 몇초면 해결될 의문"이라는 말이 참 황당할 뿐입니다.

조갑제씨. 저도 질문 있습니다

이제 이 긴 글을 마치면서 저도 조갑제씨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생산한 '문서의 신뢰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국가정보원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전달받은 '한 장의 문서'가 있습니다.

사건 발생 당일인 75년 8월 17일 밤 9시에 생산된 이 문서는 제목이 '중요상황보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서 장준하 선생 유족이 처음 의문을 갖게된 이른바 '괴전화의 실체'에 대해 그가 누구인지 적혀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사고가 발생한 직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집으로 사고 소식을 전한 이 괴전화의 실체가 바로 이 사건의 왜곡된 진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괴전화를 한 이가 누구인지 늘 궁금해 했습니다.

조사관으로서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구나 75년 당시 포천 약사봉에 설치된 전화를 확인해보니 그 인근에 전화가 설치된 곳은 이장 집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4년 이장 집을 찾아가 "혹시 사고 당일 전화를 빌려준 사실이 있냐"고 물으니 그는 딱 부러지게 답을 합니다. "사고 당일은 물론이고 평생 누구에게도 이 전화를 빌려준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이장 집이라서 놓아준 행정 전화를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빌려줄 수 없다는 철학이 뿌리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인근의 민가에서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는 조건인데 도대체 누가 장준하 선생 집에 전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괴전화를 했다는 이가 중앙정보부가 생산한 '중요상황보고'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김용환씨로 써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제가 느낀 경악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제 눈을 의심하여 보고 또 보고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참을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중정 문서를 근거로 김용환씨에게 그 경위를 묻자 그의 반응은 폭발적인 분노였습니다. 그는 괴 전화를 한 사실이 없다며 매우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무조건 아니라는 그의 예상치 않은 부인에 "그렇다면 중정이 문서를 조작이라도 했단 말이냐"며 반문하자 그는 "중정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말을 하고는 이어 갑자기 조사를 거부한다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강제 수사권이 없는 우리로서는 그냥 나가 버리는 그를 붙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조갑제씨 표현대로라면 '단 몇초면 해결될 의혹을 남겨둔 채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조갑제씨.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 역시 김용환씨의 주장처럼 중앙정보부가 생산한 75년 8월 17일 밤 9시 작성된 '중요상황보고' 문서가 조작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시 이 문서를 생산한 중정 책임자 등 다수로부터 "중요상황보고 문서는 확인되지 않으면 실명을 기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와같이 써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진술을 확보했음에도 김용환씨는 이 문서가 조작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서의 신뢰성에 대해 대한민국의 '기자 정신'을 말하는 조갑제씨에게 의견을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중정 문서가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김용환씨는 왜 자신이 한 행위를 부인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실제로 김용환씨가 괴전화를 했다면 그는 민간 전화가 없는 그때,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장준하 선생의 집에 전화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도 역시 조갑제씨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의문입니다.

장준하 의문사 반드시 재조사돼야

저는 이러한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와 관련한 '국가 차원의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거듭 주장합니다. 두개골에 나타난 '가격 흔'의 진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의 진술은 왜 계속 바뀌며 다른 참고인들과 진술이 왜 엇갈리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존안하는 있는 자료 제출을 왜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를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의혹이 다 규명된 사건'이라며 장준하 선생 사인 재조사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이 사건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의혹이 다 규명되어 조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조사기간 종료로 의혹만 남긴 채 문이 닫힌 분명한 의문사'라는 것입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는 반드시 재조사 되어야 합니다.


고상만 객원기자

고상만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고상만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