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노동자와의 만남

내 인생의 첫 수업[16] 남윤인순l승인2007.09.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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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3월 국어교사의 꿈을 안고 사범대학 국문과에 입학한 나는 독서회에 가입하였다. 문학을 공부하려고 독서회에 가입했는데 나중에 보니 겉은 독서회이고 속은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운동권 서클이었다.

그 독서회에서 역사, 철학, 문학, 농업 등 대학입시보다 더 열심히 발제와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후배들에게 사회과학을 가르쳐주는 선배가 있었고 방학이 되면 합숙을 하면서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선배의 가르침과 생활태도는 후배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새로운 지식과 철학을 접한 나는 감동과 열정으로 밤을 지샌 기억이 난다.

노동자 야학을 만나다

스무살을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고 겨울방학을 맞아 인천 집에서 지내던 중 함께 사회과학을 공부하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유신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당시인지라 사회과학 학습을 하다가 들통이 나면 구속되기도 하였다. 친구는 아무말도 없이 내 손을 잡고 인천 답동성당에 데려갔다.

당시에는 성당과 교회에서 학습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줄 알고 따라갔다. 답동 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야 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칼바람이 불었고 빰이 시려워 옷깃을 세웠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답동성당 앞마당에 들어선 나는 내 인생의 첫 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과 미주치게 된다. 파란 작업복과 흰 수건을 쓴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기도회를 갖고 있었다. 수백명의 여성들은 동일방직에서 민주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당한 반인권적인 상황을 증언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본 여성노동자들의 외침은 내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들었다.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외침과 분노는 나에게 세상을 똑바로 알려주는 첫 수업이 된 것이다.

당시 인천 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하시던 조화순 목사님(현 여성연합 지도위원)을 만나게 되었다. 조 목사님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선동적인 제스처로 박정희 유신독재를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현장에서 느끼라

책으로만 접하던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분명해졌다. 추상적이던 ‘민주주의’와 ‘노동해방’ 이라는 단어는 이제 나에게 실천으로 다가왔다. 충격과 분노로 온 몸을 떨면서 답동성당을 내려오던 스무살 나는 새로운 인생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학내 민주화 운동에 관여하다 강제퇴학을 당한 후 국어 교사의 꿈은 접었다. 학교는 아니지만 부평야학을 만들어 부평공단의 반도상사 노동자 야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난 후 모든 모임이 금지되면서 야학도 문을 닫고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 공장에 취업하면서 나의 사회운동 인생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쭉 노동운동, 여성운동을 해 오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스무살 겨울을 떠올리곤 했다.

이제 희미해진 기억이 되었지만 인생의 첫 수업을 강력하게 받은 셈이다. 첫 수업에서 배운 가장 큰 원칙은 관념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느끼고 호흡하라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지금도 큰 교훈으로 갖고 있다. 운동은 자기 주장만 펼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때 재미있다. 현실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디자인과 색으로 변화를 창조할 수 있어서 지금까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남윤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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